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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13. 2020

어머니는 이력서가 싫다고 하셨어

잊을 수 없는 엄마의 이력서

사람은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나 역시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장의 종이가 있다.


바로 엄마의 이력서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주부였다.

그리고, 계속 주부였다.


하루종일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심심하면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비빔면을 먹던 중학생 시절에도, 프리미어 리그에 빠져 호날두에 과몰입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엄마는 늘 현관 문 옆 소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란 늘 집에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우리 엄마는 친구랑 어울리는데도 별 취미가 없어 정말 말 그대로 집에만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티벳여우 같은 표정으로 금동관음보살좌상처럼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그 눈이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엄마' 그 자체의 모습이다.


진짜 이런 표정으로
이러고 티비를 보고 계셨다.



그래서일까. 집에만 있는 엄마가 안쓰럽다거나, 나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대로가 충분히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집안 일도 물론 힘들겠지만, 본인이 가정주부를 선택 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엄마에게 특별한 욕심이나 후회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를 사람이 아닌 미륵불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엄마의 이력서를 발견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


엄마는 외출 중이었고, 비상약을 찾으려온 집을 뒤지다 엄마 화장대 서랍까지 열게 됐다.

맨 아랫 서랍에 꾸깃꾸깃 종이와 신문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평소였음 지나쳤겠지만 그 날따라 왠지 신경 쓰였다.


뭐지 싶은 마음에 종이를 열었다.

놀랍게도 '이력서'였다.


이름, 나이, 성별, 집 주소, 핸드폰번호까지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를 보고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엄마가 일을 한다고? 왜?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내 상상속 엄마는 "집에 있는 사람" 이었고, 일이나 욕심 같은 것에 늘 거리가 멀었으니까.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학력'란이었다.

 중학교 졸업이라는 글씨가 날카로운 유리처럼 내 눈을 찔렀다.


엄마는 늘 자신을 '고졸'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대학 안 나왔구나 생각했지만, 다시 떠올려보면 말이 안되긴 했다.

엄마는 7남매 중 첫째였고, 17살 때부터 서울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말을 들을 때 '타지에서 학교다니랴 일하랴 생활 힘들었겠네' 가볍게 생각했다. 도무지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도 못 다닐 정도로 힘든 삶이 뭔지 쉽사리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년대의 K-장녀는 자기 몸을 가눌 수 있으면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해야 하는 존재였다.

엄마는 남은 동생들을 위해 먼 타지에서 공순이가 되며, 자신의 삶을 한 번 포기 했다. 그리고, 나를 낳고 가정주부가 되며, 두 아이와 남편을 위해 또 한번 자신의 삶을 포기 했다.


고졸이라고 거짓말 했던 엄마의 자존심이,

500원짜리 문구점 이력서에 꾹꾹 눌러쓴 글씨가,

그럼에도 텅텅 빈 경력란이,

공장 3교대에 동그라미 쳐 둔 빨간 형광펜이,

내가 버린 로드샵 화장품들이 놓여있는 화장대가

왠지  전부 서럽게 느껴졌다.


난 그날 엄마의 화장대에 앉아 울었다.




왜 엄마는 50대에 다시 일을 하려 했을까?

아직까지 알 수 없다.


늙으막에 다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하고 학교도 다시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공장에서 일 하는게 자아실현일 리는 없고,

아마 어떤 개인적 권태거나, 내게 말하지 못할 집안 사정이 있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가장 서러웠던 것은, 살면서

내가 그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줄 곧, 우리집은 잘 살고 있다 생각했다. 넉넉하지는 않은 살림이었지만 먹을 것 먹고, 필요한 것은 사고, 딱히 불편함은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건 내가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건, 누군가가 그 만큼의 대신 아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보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사람은 어떤 고통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


기술직인 아빠 월급이래봤자 200만원 초반이었다. 그 돈으로 누군가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때, 누군가는 불편한 하루를 당연하게 살았을 것이다. 괜히 엄마가 티벳여우같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이력서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넘겨준 육아일기


그 이후, 어느날 엄마는 내가 이력서를 본 걸 안 건지 

아님 그냥 말 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이력서가 쓰기 싫다"라는 말을 했다.


어딘가 발가벗은 느낌이 든다는 이유였다.

갑작스런 말에 한 마디쯤 뭔 소리냐 물어볼 만도 했지만, 그냥 모른 척 무릎에 누워 엄마에게 귀를 파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 이후로 엄마는 몇번 깔끔한 옷을 입고 외출했지만, 출근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며, 내 직업도 수번 바뀌었지만, 엄마는 늘 현관문 옆 소파에 앉아있다. 


하지만 10년 전 그 이력서는 내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 됐다. 내 삶의 목표는 그 이후로, 어영부영 남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우리 엄마의 동상같은 삶음, 평생 단조로웠던 저 삶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지 그 생각 뿐이다.


싫어하는 이력서는 이제 쓰지 마세요.

제가 이제 엄마의 지지대가 되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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