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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ne R May 24. 2024

부모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3

엄마 둘, 남매 하나 <엄마가 이상하다>

아드리, 너 그거 꼭 해야겠니..?



 귀를 의심했다. 우리 집에 도착해 아이를 보신 첫날 이미 둘째를 제안하며 웃었던 엄마가 갑자기 엉뚱한 태도를 보이셨다. 이른 아침, 병원 로비에서 지구 반대편의 엄마와 통화를 하며 벌써 IUI에 두 번이나 실패해서 초조하다는 말을 하던 참이었다.


첫째 딸 나나를 부모님께 보여드린 후, 우리에게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집에서 늘 말이 없는 편이었던 나는 드디어 아이를 매개로 엄마에게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초조한 마음으로 내 남편감을 찾는 노력을 그만두셨다. 일주일에 한 번 영상통화를 하며 아이를 보여드리고 이곳의 생활을 업데이트했다. 약간의 변화였지만 차이는 확실했다. 내 일상을 숨기는 일에서 벗어나자 미뤄둔 숙제를 성공적으로 끝낸 것처럼 일상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이후로 둘째를 갖기 위한 검사를 위해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는데 엄마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엄마는 손쉽게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였다. 예전에는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과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동일선상에 있고 엄마의 한마디가 감정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을 선택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께 미주알고주알 사소한 것까지 말하며 지내지는 않으니까. 상황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손에 쥔 카드를 모두 열고 안심한 후에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니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예전처럼 다시 문을 닫고 말수를 줄이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의 미지근하고 변덕스러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가임기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결국 나는 확률이 높은 IVF (호르몬 주사법이 개입되는 시험관 시술)를 통해 둘째를 가졌다. 당시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케이스였지만 아내의 회사에서는 이미 십 년 전부터 아이 세명까지 시험관시술을 지원하는 보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 둘 모두 가임기가 끝나기 전에 기회를 잡아야 했다. 챗 GPT에 물어보니 지금은 다른 회사들도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난자 냉동만 지원하던 예전에 비해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 내 여러 회사들이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 관련 비용 전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스포스, 스타벅스, 핀터레스트, 아마존, 뱅크오브아메리카, 시스코 등의 회사가 대표적이다. 보험이 없다면 시험관 한 사이클(cycle: 한번 시도하는데 걸리는 한 달의 시간) 당 약 만이천 달러에서 만 오천 달러의 비용이 소요된다. (천오백만 원 보다 많은 수준) 인재유치를 위해서 아이 갖기를 장려하는 미국 회사들의 정책이 여전히 생경하게 다가온다. 위 회사들 중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구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4, 5개월의 산후휴가를 제공한다. 미국사람들은 참 아이를 많이 낳는다. 생활비가 많이 들고, 초등학교 진학 전까지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내는 금액이 크고, 대학 등록금도 비싸졌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여력이 된다면 세명 정도 아이를 갖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넓은 미대륙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들 아이를 너무 좋아하고 아이 일이라면 다 함께 불편을 감수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으로 아이를 환영함을 알 수 있다.

귀엽고 작은 둘째의 백일 발. 지금은 두배쯤 커졌다.




엄마는 산후조리도 열심히 해주셨다.


"이럴 때 해줘야지 언제 해주겠어."


일 년에 한 번 보면 많이 보는 편인 엄마는 내 소중한 순간을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딸도 돌보고 딸의 아들도 돌보는 엄마는 맨 뒷줄에 서서 순서를 양보하는 사람이지만 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아 다행인 눈치였다. 엄마와 함께 오랜만에 서두르지 않고 삼 개월을 함께 보내니 아이 때문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편안했다. 엄마도 분명 많은 일을 챙기느라 피곤하셨겠지만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까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워하셨다.


둘째의 백일 사진을 찍기 전.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어 기뻤다.



귀국 후 엄마는 한동안 시차적응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곧 운동과 각종모임과 조카의 등교를 챙기는 일상으로 복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고백을 하셨다.


“이제 모임에 나가기가 부담스럽다.”


엄마는 오랫동안 안정적인 조직에서 일하셨고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이 왕성해 참여하는 모임도 여러 가지였다. 많은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석하고 보통 6개월 전에 약속이 잡혔기 때문에 가끔 내가 한국에 방문할 때도 미리 언질을 드려야 했다. 케이팝 아이돌도 이렇게 바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배려심 있고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엄마를 모두 좋아했다. 그런 엄마가 갑자기 모임에 나가기 부담스럽다니 심상치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대화도 있었다.


”엄마, 내 게이 친구가 부모님한테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들었대. 정말 너무하셨지.”


”…… 난 그거 이해해. “


우리 집에서 아이와 아내를 만났던 그때, 엄마는 분명히 우리를 보고 웃었는데? 모든 게 부드럽게 흘러가 안심했었는데? 의외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웃는 아이를 앞에 두고 차마 놀랄 기회, 분노할 기회, 슬퍼할 기회, 한동안 혐오하고 놓아줄 기회를 앞세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부쩍 말이 많아진 내게 통화시간의 대부분을 내줄 뿐이었다. 너무 좋은 사람들은 자주 스스로를 맨 뒷 줄에 세운다. 엄마가 내가 지냈던 벽장에 들어앉아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국의 지인과 친척들에게 내가 했어야 하는 커밍아웃을 엄마에게 모두 위임한 채로. 나에 대한 일을 아주 천천히 소화시키는 엄마를 보니 아무것도 재촉할 수 없었다. 나도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한두 해가 걸린 게 아닌데, 그러고 계시지 말라고, 빨리 털어버리시기를 종용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생각 못하는 것과 같았다. 차라리 내가 뺨이라도 한 대 맞았으면, 엄마가 분노할 기회라도 만들어 드렸으면 나았으려나.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엄마의 속도를 기다렸다. 네 살쯤이 되어서야 겨우 앞뒤가 맞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이의 성장속도를 체념하듯 기다렸던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이런 걸 엄마 마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모두 잔인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모임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는 것 같지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을 추천해 드렸지만 근심을 들고 덩그러니 낯선 모임에 성큼 들어설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함께 참여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아쉬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엄마가 아주 조금씩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워낙 진솔하고 인간관계의 폭이 넓은 엄마 입장에서는 여전히 뭔가를 숨겨야 한다는 점이 시원치 않겠지만 심리적인 벽으로 다소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엄마는 선전하고 있는 편이었다. 둘째가 여섯 살이 된 지금, 엄마의 들쑥 날쑥한 반응도 잠잠해지고 인간관계에서의 망설임도 많이 회복하셨다. 평생 기다려야 되는 줄 알았는데 십 년 정도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더 늦지 않아 다행이다.




아이들이 커밍아웃을 하면 부모가 다시 벽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렉 맥도널드, 린 맥도널드

When a child comes out of the closet, a parent often goes into the closet
-Greg McDonald, Lynn McDonald



남매는 이때 사이가 제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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