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by 인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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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곳으로 갈 것이다.


아침. 마음 속의 숲길을 지나, 여기도 저기도 아닌. 마음과 마음 사이.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한 그 곳으로 갈 것이다. 작은 강이. 천년 전의 바다처럼 유유히 흐르고.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오백 년 된 아름드리 참나무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숲으로 둘러 쌓인 동그란 공터에. 낡고 작은 집 한 채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무 그루터기가 앉아있는. 그 곳으로 갈 것이다.


조용히 작은 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면. 또박또박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서 있다. 아이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 보다. 영원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오려낸 종이 속. 까만 밤하늘 같은 눈으로 말하겠지. ‘내가 바로 너구나.”


우린. 집 옆 나무. 그루터기에 나란히 앉아. 아무 말도 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것이다. 나무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의 결을 느낄 것이다. 숲 위. 동그란 하늘 위로 지나가는 구름의 향기를 맡을 것이다. 따뜻한 햇살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할 것이다.


그럼. 아이가 “이제 괜찮아.”하고 내 등을 톡톡 두드려 줄지도 모른다.


우린 춤출 것이다. 둘이서. 한바탕 야단법석을 피울 것이다. 온 숲이 떠나가도록. 마음껏 뛰어 놀 것이다. 같이 뒹굴 것이다. “아!” 마음껏 고함칠 것이다. 신나게. 신나게. 노래 부르고. 마구마구 땀 흘릴 것이다. 우리가 맨 처음 같이 보았던 영화. 킹콩을 다시 볼 것이다. 집 안 가득 낙서하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먹고. 마실 것이다. 아직도 가슴을 벌렁거리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며 물을 것이다.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곤 드러누워 별이 돋아나는. 밤 하늘을 볼 테다. 파도소리 같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별들의 운행을 지켜 볼 테다. 우주의 나지막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르. 잠들 것이다. 한숨 푹 자며. 내 생의 마지막 꿈을 즐길 것이다.





‘이 뭐꼬?’ 꼭 이런 불교의 화두가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하는 곤란한 질문에 부딪히곤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에 대해 가장 잘 알아야 할 본인이 정작 그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 중역 출신, 맥케너란 여성의 다음 고백은 곧 나의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나는 곧바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다리가 셋 달린 의자처럼, 매일 하는 일 없이 넘어졌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 따위 받지 않겠다’는 짐짓 단호한 결심으로 세상에 나섰지만 정작 내가 가진 것은 명함에 찍힌 직함이 거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 직장의 규칙적인 봉급과 주말이 주는 아늑한 휴식을 포기한 이유가 단지 일하기 싫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야 한다는 불필요한 사명감.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와 조직이 규정해주지 않은 나 자신의 불확실한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감. 이런 것들이 매일 나를 넘어뜨렸다.


보조국사 지눌은 말했다.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철학자 들뢰즈는 말한다. “반복은 언제나 두 번에 걸쳐서, 한번은 비극, 또 한번은 희극으로...” 넘어진 이유를 정확히 보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다시 반복된다. 들뢰즈는 덧붙인다.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 까닭은 “정확히 그가 본질적으로 어떤 무한한 앎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가 넘어지는 그 자리를 한번 들여다보기로 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나를 직접 볼 수 없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서만 들여다 볼 수 있듯이, 내가 나를 보기 위해선 다른 눈과 렌즈 - 타자, 언어, 도구 등 - 가 필요하다. 가령 우리는 현재의 업무나 가족과 연인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때로는 전문적인(?) 도구의 힘을 빌기도 한다. MBTI, 스트렝스 파인더, 애니어그램 등등. 동양에는 ‘사주명리학’이란 오랜 도구가 있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에 우주의 기운이 몸으로 들어온다고 본다. 우주의 기운이란 바로 별들의 기운이다. 인간의 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전제는 서양 점성술이나 동양의 명리학이나 같다. (...)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은 태양계 안의 별들이고, 이를 다시 간추리면 해와 달, 그리고 수목화금토성이다. 사주팔자는 이들 일곱 별의 기운을 어느 정도 받았는가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세력으로 사주를 뽑아보았다. 아직 초보라 명확히 알 순 없지만 그럼에도 이 글자들은 어렴풋이 자신을 비쳐준다. 연월일시의 사주(四柱)와 천간과 지지의 여덟글자(八字)가 내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카드이다. 흔히 이를 운명이라고도 하지만, 자신의 사주팔자를 어떻게 운용할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정체성에 대한 사뭇 진지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최근 사주를 뽑아보았다는 소박한 결론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아마도 이 글 또한 나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리라.





* 조안 B. 시울라, <일의 발견>


** 조용헌, <한국의 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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