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미국 서부 로드 트립
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샌디에고에 도착했다. 사람마다 여행을 즐기는 방식은 다르다. 부지런을 떨며 최대한 관광지들을 많이 구경하는 '본전 뽑기형' 여행자들이 있는 반면,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일상에 가까운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나와 여행 파트너들은 모두 '한 곳에서 머무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샌디에고에서의 마지막 3박 4일은 특별한 계획 없이 지내기로 했다. 관광지보다는 작은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고 한적한 해변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무계획이 가져다 주는 여유와 예기치 못한 작은 행운들은 우리의 여행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해둔 숙소는 Ocean Beach라는 지역에 있었다. 숙소를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는데 여느 토요일보다 흥분된 분위기로 거리가 떠들석했다. 알고보니 그 날은 미국의 공휴일인 콜럼버스 데이 주간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10월 1일을 맞아 옥토퍼페스트가 열리고 있었다. 마지막 여행지라는 아쉬움에 잠시나마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금 흥분되기 시작했다. 샌디에고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몸과 마음을 풀어해치고 한 손엔 맥주를 들며 한바탕 춤부터 췄다. 지금도 샌디에고를 떠올리면 그 아름다웠던 한 밤의 열기가 떠오르곤 한다.
이효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캘리포니아 해변은 모든 이들의 상상처럼 서퍼들과 패들 보딩을 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남편의 아이디어로 패들 보드 위에서 요가를 배워보기로 했다. 평소 패들보딩을 해보고 싶었던 나의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지난 날 '효리네 민박'을 보다 이효리가 바다 한 가운데서 패들 보딩을 하는 장면에 반했다. 절대 이효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느낌이나 맛보자 하는 마음에 근처 해변에서 배울 수 있는 90분짜리 클래스를 예약했다. 우리 말고도 몇 명의 미국인들이 같이 수업을 들었는데 바다에 나가보니 워낙 물을 무서워하는 나만 구명쪼끼를 입었다. 그래서 몸은 무겁고 아둔했지만 어렵사리 균형을 잡으며 강사의 동작을 천천히 따라했다. 물 위에서 나의 호흡과 밸런스에 집중하다보니 한 시간 반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다행히 물에는 빠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구명쪼끼를 벗고 홀가분한 몸으로 패들 보딩을 해보리라 생각했다.
나와 남편은 언제나 캘리포니아의 도시 중 샌디에고가 가장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여행이 부리는 마법 때문이었을까. 미서부 최남단에 위치한 샌디에고는 LA나 샌프란시스코보다 따뜻했고 사람들도 더 여유로워 보였다. 같은 미국에 살고 있는 나와 남편도 샌디에고는 외국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애틀 사람들은 이렇게 친절하지 않은데" "여기 사람들 표정을 봐. 여유가 넘치네" 한국에서 온 나의 후배는 시애틀에서도 충분히 그 여유를 느꼈다고 했거늘. 이렇듯 여행지에서는 만물이 새롭고 바람과 공기마저 달리 느껴진다.
왜 우리는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는 전연 새로움을 찾지 못하는 걸까. ‘집’은 세상에서 가장 편하지만 가장 진부한 장소다. 반면 여행은 집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이 익숙지 않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차있다. 편하고 익숙한 주변부로부터 무뎌졌던 감각이 여행을 떠나는 순간 숨구멍이 열리듯 다시금 활발히 호흡하게 되는 것. '이국적', '이색적'인 것들을 경험케 하는 여행이란 행위에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아닐까.
왁자지껄했던 축제가 이 도시를 기억하는 첫 장면이라면 샌디에고의 선셋은 내 마음 속의 엔딩 크레딧이다. 이른 저녁 우리는 선셋 스팟으로 유명한 Sunset Cliffs 로 향했다. 보름 가까웠던 로드 트립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이보다 더 완벽한 장소는 없었을 것이다. 해가 지는 저녁 무렵 해안 절벽 곳곳엔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친구, 연인, 가족들이 있었다. 그 중엔 우리, 오늘 이후 기약 없는 재회를 기다려야 하는 이들도 저 멀리 하늘을 물들이던 석양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미국에 살게 된 후 놀러 오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짜 찾아온 사람은 이번 여행을 함께한 후배 한 명 뿐이었다. 2살 터울의 대학 선후배로 만난 우리는 각자가 가장 힘들어했던 스물 셋, 스물 한 살의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때 내겐 학교를 오고 가던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나눈 후배와의 짧은 대화들만큼 위로가 되는 게 없었다. 이후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서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았으며 결혼으로부터 달라진 나의 인생을 그녀는 그 누구보다 응원해주었다. 그토록 아끼는 동생과 사랑하는 남편까지 함께한 이번 여행이었다. 얼마 전 포르투칼을 여행 중인 동생에게 전화가 왔거늘. 그녀는 여행만 가면 나와 남편 생각이 나는가보다. 나는 그녀가 맛있게 먹던 치폴레를 먹거나 그녀가 좋아할 만한 레스토랑에 가면 어김없이 "소라 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이야기 한다. 20대의 나는 혼자하는 여행을 고집스럽게 사랑했다면,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 더욱 좋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나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하며 8편의 여행기를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