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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Apr 28. 2022

JKF8 번외편

노동조합의 미래

스몰스가 주도한 조업 중단과 곧이은 해고, 아마존 경영진의 차별적인 시각이 드러난 이메일 유출 등은 분명 이목을 끌었지만,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들려온 포레스트 검프의 고향 앨라바마(Alabama)주 베시머(Bessemer)에 있는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 한다는 소식은 스몰스와 팔머에게 솔깃한 이야기였다.

영화에 나오는 검프의 고향 그린보우는 가상의 마을이다. 사진=Allstar/PARAMOUNT

팬데믹이 계속되고 집에 갇힌 사람들이 재택근무와 격리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면서 생겨난 '절호의 기회'를 아마존은 기어이 잡아냈다. '역대급 매출'과 밀려드는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기록적인 신규 채용'을 이어가는 아마존의 행보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분야를 막론하고 팬데믹으로 경제가 멈춘 탓에 직원들을 해고하고 줄줄이 문을 닫던 때였다.


아마존의 성공은 스몰스와 JFK8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된 덕분이 아니었다. 아마존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고, 다른 기업들이 잇달아 직원을 해고하는 통에 구직자들은 늘었다. 아마존 물류창고 직업은 급여나 복지 혜택 측면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일자리였다. 특히 동종업계 치고 높은 급여도 급여지만, 일하는 첫날부터 의료보험이 제공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미국에서 의료보험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한국인이 상상하는 수준을 다섯 제곱 정도 하면 된다. 특히 팬데믹이 가장 기승을 부리던 때다. 의료보험은 3층 건물 높이쯤으로 느껴지던 병원 문턱을 눈높이쯤으로 낮추는 효과가 있었다. 채용 공고만 내면 어렵잖게 일자리를 채울 수 있던 아마존에 노동자의 안전을 우선시하거나 더 배려하는 일은 '가뜩이나 돈 긁어모으기 바쁜데 쓸데없이 부리는 사치'였다. (팬데믹 이후 석 달 만에 아마존은 물류창고 직원과 배송 업무를 맡을 직원을 35만 명 채용했다.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고용이다.)

그래서 스몰스와 팔머는 더더욱 베시머에 가야 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이윤을 좇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계속 묻히고 있었다. 아마존의 성공이 빛나는 건 가족의 생계와 (팬데믹으로부터) 가족의 안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노동자들에게 드리운 그림자 덕분이라는 걸 어떻게든 알려야 했다. 몇 달째 바위를 향해 계란을 던지던 스몰스와 팔머는 베시머에서는 좀 단단한 계란 모양 짱돌을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를 품고 앨라바마로 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몰스와 팔머는 베시머에서 큰 실망만 안고 돌아온다. 다분히 즉흥적으로 (언론에 거짓말까지 하면서) 벌인 조업중단에서 비롯된 둘의 여정과 비교하면 베시머 물류창고 노동자들은 이미 단단한 조직을 구축하고 아마존에 단호한 결의를 보여줄 참인 것 같았다. 전국적인 단체와 커다란 노동조합의 후원도 받고 있었고, 베시머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대열에는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아 코르테스(AOC) 같은 거물 정치인도 있었다. 

그런데 베시머 물류창고 노동자들의 투표 결과는 이런 희망에 찬물을 끼얹고도 남았다. 노동조합을 원치 않는다는 노동자가 원한다는 노동자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반대 1798 : 찬성 738) 참패였다. 베시머 노동자들의 비결을 배우러 간 여행에서 스몰스와 팔머는 "우리는 쟤들이 한 실수 절대 하지 말자"는 다짐만 하고 돌아오게 된다.

저희 둘 다 당연히 (노동조합 만들겠다는 움직임을) 100% 지지했고, 안 갈 이유가 없잖아요. 당장 베시머로 운전해서 달려갔어요. 한 60시간 넘게 걸렸죠. (쉬지 않고 운전하면 뉴욕에서 15시간 거리) 도착해서는 바로 노동자들한테 가서 내가 이러 이런 사람인데, 도움이 되고 싶어서 왔다, 물류창고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고 고충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데 나도 참여하고 싶다고 했어요. 고맙다는 말은 뭐 안 들어도 상관없었어요. 저도 직접 보고 경험하고 배우러 온 거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들 말이 "아, 우리는 앨라바마식으로 할 생각이니까 고맙지만 사양할게요."라는 거였어요. - 스몰스

도대체 앨라바마식은 무슨 말일까? 

그때는 저도 뭔 소린가 했죠. 갑자기 앨라바마식이라니, 남부엔 뭐가 다른 게 있나 했거든요. 이제는 알아요. 베시머 물류창고에서 노동조합을 추진하던 사람들은 저랑 팔머가 시위에 참여하는 걸 불편해했어요. 아니, 우리가 현장 노동자들과 만나는 것 자체를 엄청 꺼려하더라고요. 이유는? 제가 조업중단을 주도하고 나서 해고당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저를 보고는 '나도 노조에 찬성했다가 해고되면 어쩌나' 두려워하면 안 되니까 미안하지만 뉴욕으로 돌아가 달라고 했어요. - 스몰스
노동조합을 제대로 만들 생각이라면 크리스가 해고당한 이야기는 노동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여야 정상 아닌가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생생한 사례를, 산증인이 직접 제 발로 찾아와서 나누고 싶다는데, 그걸 거절한다? 저는 당최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저라면 크리스 사례를 들려주면서 이런 일이 우리한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노조가 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적극적으로 말했을 거예요. - 팔머


스몰스와 팔머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앨라바마에 왔으니 '앨라바마식'을 따르기로 하고 시위엔 가지 않았다. 그래도 주유소에 기름 넣으러 갔다가, 동네에서 점심 먹으러 다니다 보면 아마존 물류창고 노동자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말로 노동조합 투표에 관한 이야기를 던졌을 때 적잖은 노동자들이 찬반은커녕 그런 투표가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노동조합을 꾸리겠다는 이들이 노동자들과 철저히 괴리돼 있었다. 그러니 어떤 구호를 외치더라도 공허할 수밖에. 스몰스와 팔머는 온 미국이 주목하는 베시머 물류창고 노동조합 투표에서 노조를 추진하는 이들이 크게 망신을 당할 거라는 씁쓸한 확신을 안고 JFK8으로 돌아왔다. 

(투표 결과가 나온 뒤 투표 절차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사측이 투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규정을 위반해가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인정돼 지난달 다시 투표를 했는데, 표 차이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과반의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반대 993, 찬성 875))


투표 절차를 둘러싼 논쟁과 별개로 아마존은 예상대로 베시머 물류창고 노동조합 투표 결과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물류창고에서 노조가 웬 말이냐, 아니 아마존에서 노조가 가당키나 하냐, 사실 미국은 원래 노조가 안 되는 나라라는 통념이 다시 한번 확인되며 굳어지고 있었다. 아마존은 월마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이다. 그런 아마존에서 몇 년 동안 노동조합이 공을 들인 노조 설립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아마존에는 중요한 승리, 진보 진영과 노동조합에는 쓰라린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베시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기로 한 스몰스와 팔머의 생각은 달랐다. 둘은 오히려 뭐가 잘못됐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기성 노동조합의 지지 없이 굳건히 홀로 설 노동조합을 꾸리기로 했다. 이름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아마존 노동조합(ALU, Amazon Labor Union)이었다.

아마존 노동조합(ALU) 조합원들. 사진=크리스 스몰스 트위터
노동조합이 역사가 길잖아요. 오랫동안 노동조합이 해왔던 방식이란 게 있는데, 저 같은 현장 노동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노동조합에서야 당연히 "응, 아냐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하겠죠.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좋다는 옛날 방식대로 했다가 실패하는 걸 똑똑히 봤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저렇게 하지 말자고 마음먹은 거죠.
당연히 쉽지 않으리라는 거 알았어요. 우리는 돈도 없고, 모든 게 죄다 부족했죠. 노조의 지원을 받으면 그런 어려움이야 덜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게 실제 노동자들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노동자들이 원하는 걸 모아내는 거잖아요. 그거 못하면 노동조합이 있을 이유도 없죠, 뭐. 그래서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우리 방식대로 원 없이 해보고 실패하자고 생각했어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단한 노동조합의 일원이 되기로 하고 그 사람들이 현장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걸 보느니 우리 식으로 하기로 했어요. - 팔머 


"When iron is hot,"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우리말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크리스 스몰스는 여기서 비슷한 영어 표현을 썼다. 다리미가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천조각이라도 다리자는 소린데, 베시머 물류창고 노동조합 문제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아마존과 노동조합에 쏠린 지금 더 기다리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전문가의 경험'을 익히려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무기를 살려보자고 스몰스는 생각했다.

베시머에서 저희가 돌아왔을 때 저희 팀원 중에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의 경험을 공부하고 배우자는, 음 그러니까 스터디를 하자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도 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온라인 강좌에 등록은 했는데, 다른 일로 바빠서 결국 수업은 한 번도 못 들었어요. 데릭도 같이 등록했는데, 아마 일하느라 바빠서 못 들었을걸요?
아무튼 뭐 이런저런 사례 더 알아보고 준비하는 거 나쁠 건 없죠. 근데 저는 그런 것보다도 다리미가 뜨거울 때 뭐라도 다려야 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지금 베시머 덕분에 다시 사람들 관심이 아마존에 모여있는데, 우리도 관심을 끌 만한 무언가를 하려면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또 하나 좀 거시기했던 게 온라인 강좌에 강사로 나오는 분들이 다 뭐 훌륭한 분들이겠지만, 이 사람들이 갖췄다는 전문 지식, 경험이라는 게 결국 옛날 것들이잖아요. 우리가 지금 하려는 건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식인데? 그럼 스터디를 해서 지식을 쌓을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느끼고 겪으며 쌓은 경험, 생각들을 곧바로 활용하면 되겠다 싶었죠. 그게 우리의 전문성이고 우리가 가진 무기니까요. - 스몰스


스몰스와 팔머는 월마트에서 150달러를 주고 탁자 2개, 의자 4개, 텐트 하나를 샀다. 아마존 노동조합 추진위원회의 첫 공식 지출이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은 돈의 일부였다.) 그리고 JFK8 노동자들이 출퇴근할 때 매일 지나는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책걸상을 펴고 텐트를 쳤다. 굳이 버스정류장을 고른 이유는? 공공장소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아마존의 사유지가 아니라서 아마존이 퇴거를 명할 수 없었다. 물론 나중에 아마존은 노동자들을 '치우려고' 했지만. 어쨌든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매일 지나는 버스 정류장 (옆 공터)에서 아마존 노동조합은 첫발을 내디뎠다. 매일 수백, 수천 명을 보게 되니 베시머의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사실상 0에 가까웠다. 어쨌든 목 좋은 곳에 자리는 잡았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스몰스도 처음에는 무척 뻘쭘했다고 회상한다.

어우, 처음 그렇게 자리를 편 날이 더운 여름날이었어요. 사람들이 버스에서 줄줄이 내려서 나오는데, 멀뚱멀뚱 서 있었죠. 그저 설렁설렁 만든 팸플릿 나눠주면서 "우리가 노조를 만들 거다. 그러려면 여기 위임장(authorization card)에 서명해 달라."는 말을 완전 어색하게 했던 것 같아요. - 스몰스

여기서 위임장이란 미래의 조합원으로부터 새로 꾸릴 노동조합에 단체 협상을 벌일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서명을 받는 명부다. 사업장 노동자의 30% 이상이 위임장에 서명해야 미국 노동관계위원회(NLRB, 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에 노조를 만들겠다고 신청할 수 있고, 위원회의 승인을 받고 나면 그때 노동조합 설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데, 실제로 미국은 노동조합 만들기도 까다로운 나라에 든다. 어쨌든 스몰스와 아마존 노동조합은 절차를 따랐다.

땡볕에서, 비바람 맞으며 노동자들을 만난 스몰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팔머를 비롯해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노조를 알린 이들도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갔다. 팔머는 매일 "필수노동자들의 모임(TCOEW, The Congress of Essential Workers)"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일했다. 스몰스가 조업중단을 주도했다가 해고되는 걸 보고 실제로 위축된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다. 불만의 목소리를 모으고 회사에 당장 맞설 사람을 규합하는 대신 팔머는 팀 별로, 부문 별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리고, 왜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물론 그 와중에도 주어진 시프트를 다 돌며 일도 해야 했고, 출근하기 몇 시간 전, 퇴근 후에 몇 시간은 친구 크리스가 머무는 텐트에 가서 같이 있어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주러 가야 했으니, 노조는 곧 이들의 삶이 됐다. 누가 "너 요즘 뭐하니?"라고 물으면 진짜 "노조 하는데요"라고 답했을 거다.


미국 기업들에도 이른바 '노조 파괴 매뉴얼'들이 있다. 그 매뉴얼의 기본 전략 가운데 하나가 '진짜 노동자'와 '가짜 노동자'를 나누는 일이다. 노조를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 '진짜 노동자'는 노조에 관심 없이 말 잘 듣는 노동자일 테고, '가짜 노동자'는 일은 똑바로 하지도 않으면서 기업에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기만 하고, 다른 노동자들 바람 잡는 불순한 세력이 되겠다. '가짜 노동자'는 외부 세력의 사주와 지령을 받아 기업을 파괴하기 위해 잠입한 세력으로 그려질 때도 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내놓은 아마존이라지만, 노조를 저지하는 방법만큼은 기존 매뉴얼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존은 노동자들이 보는 게시판과 근무 관련한 공지를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노동조합은 제3의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시선이 가는 딱 그 높이 있잖아요. 거기다가도 게시판을 만들어놨는데, 사측이 공지사항에 이렇게 써놓았요. "ALU 사람들이랑 얘기도 하지 마라. 걔들은 노동조합 관련해 경험도 없으면서 노조 하겠다고 나선 애들이다." 뭐 이런 식으로. ALU 사람들이 돌리는 위임장에 서명하면 월급에서 노조비 떼 간다는 말도 돌았는데, 당연히 가짜뉴스였어요. 서명이 모여야 노조 설립 여부를 투표할 수 있는 거고, 투표에서 부결되면 노조는 없던 일이 되는 거죠. 노동조합비를 걷기까진 갈 길이 얼마나 먼데요, 그런 식으로 위협해서라도 어떻게든 노조를 못하게 막으려던 거죠.
저는 안에서 그런 가짜뉴스를 바로잡아주는 일도 했어요. 위임장에 서명했다가 해고당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한텐 물류창고 안에서 서명하기 싫으면 퇴근할 때 버스 정류장 옆에 텐트 치고 있는 크리스를 만나보라고 말해줬어요. - 팔머


그렇게 한동안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낮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겐 거의 다 서명을 받았다. 시간대를 바꿔야 했다. JFK8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갔다. 엄청난 주문량을 처리하는 건 대단한 기계나 최신식 컨베이어 벨트가 아니다. 필수노동자들이, 사람이 한다.

그렇게 더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교대로 밤에도 텐트를 지켰어요. 밤에 텐트를 지키면서 한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텐트 밤 교대는 12시에 시작했는데, 새벽 2시가 좀 넘으면 시프트를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그 사람들 어차피 집에 서둘러 갈 필요도 없으니 옆에 와서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요. 들어주다가 말을 얹기도 하고 같이 기도도 하고 그랬죠. 밤에는 좀 더 진솔해진다고 할까요? 모닥불 피워놓고 스모어(S'mores)도 만들어 먹고, 기타 치면서 노래도 하고 같이 울고 웃고 공감하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저희가 화장실만 가서 자리를 비워도 얘네 어디 갔냐고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더라고요. 어느덧 우리가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사람들이 된 거죠. 풍경의 일부가 된 거예요. 사람들이 저더러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지난 1년 동안 너는 텐트 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생했잖아. 그걸 내가 매일 봤는데, 내용이 뭐가 중요해, 네가 부탁하는 거 그거 서명 하나 못해주겠어?" 하더라고요. 그때 뭔가 확신이 생겼어요. 해낼 수 있겠다 싶었죠. - 스몰스

제3의 외부 세력이라는 모함은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마음이 대단히 비뚤어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두 눈으로 매일 보는 걸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노조 하는 사람'에게 가정과 가족은 뒷전이 됐다. 스몰스는 지난 1년 동안 가족을 몇 번밖에 못 봤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마침내 아마존 노동조합은 미국 노동관계위원회로부터 물류창고 안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스몰스도 물류창고 휴게실이나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며칠 뒤 스몰스가 노동자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고 휴게실에 들어가는 걸 아마존 경비팀 직원들이 막아섰다. 아마존 노동자가 아니면 아마존의 시설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스몰스는 매번 방문증을 받아 휴게실을 출입했는데, 절차상 문제는 없었지만 아마존은 끝내 꼬투리를 잡아 스몰스를 무단 침입자로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스몰스와 아마존 노동자 두 명을 현장에서 체포한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가 체포되던 바로 그 순간에 투표의 승패가 결정됐다고 생각해요. 아마존은 거기서 졌어요. 노동자들이 다 보고 있었단 말이죠. 1년 동안 제가 텐트 치고 사실상 거기 살면서 무얼 했는지 다 지켜본 사람들이에요. 그날도 제가 노동자들에게 점심을 나르던 중이었거든요. 그런 저를 억지로 체포했다? 아마존은 결정타를 자초했어요. - 스몰스


아마존은 2021년 노조를 저지하고 와해하는 컨설턴트를 고용하는 데만 430만 달러를 썼다. 아마존 노동조합 추진위원회가 대부분 크라우드펀딩으로 책정해서 쓴 예산은 12만 달러였다. 이런 대규모 사업장에서 자체적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해낸 비슷한 사례를 찾으려면 1930년대 제너럴 모터스(GM) 공장 노동자들의 사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JFK8 노동자들이 해낸 거다.

스몰스는 자신 있었다고 말하지만, 투표함을 열 때까지 노동조합 사람들 중에도 과연, 정말 될까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거다.

개표할 때 저도 노동 관계위원회에 가서 보고 있었거든요. 아마존은 연봉이 수십억 원 될 대단하신 변호사 여섯 명이나 데리고 왔더라고요. 우리 변호사는 프로보노로 노동조합 도와주는 한 분 계셨고요. - 스몰스


투표 결과 노조를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노동자가 절반을 넘었다. JFK8은 아마존 안에서 최초로 노동자를 대표해 노동조합이 사측과 단체 협상을 벌이는 사업장이 될 것이다. 제프 베조스에게 할 말이 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스몰스는 이렇게 답했다.

아, 사장님이 우주 가 계시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서명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고맙다면 고마운 일이네요. 우주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 스몰스

노동조합을 꾸리는 게 불가능해 보였던 건 나도 아마존의 레토릭에, 미국 주류 언론의 논리에, 세상의 통념과 타성에 젖어있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스몰스는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가 하는 말인데, 뭐라 한들 못 믿을까? 

다만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아마존은 곧바로 투표 절차에 문제를 제기했고, 아마존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스몰스와 팔머도 앞으로 펼쳐질 난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또 "아마존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표 결과를 무효로 만들려 할 텐데 어떻게 대응할지" 물으면서 나를 논리로 설득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게으르고 뻔뻔한 일이다. 아마존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길을 개척해온 대로 노동자 편에서, 노동자를 대변하며 노동조합이 갈 길을 갈 것이다. 지금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마존 노동조합의 걸음걸음을 그저 찬찬히 지켜보면 될 일이다. 


돌아보면 볼수록 크리스 스몰스라는 인물이 정말 인상적이다. 전형적인 미국 사회 흑인 노동자의 모습인데, 그렇게 리더로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어쩌면 피부색과 리더십의 관계에 관해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사실 원래 이렇게 살아온 놈이에요. 대단할 건 없지만, 저는 늘 리더였어요. 우리 집에서 제가 장남인데, 엄마 혼자 저랑 동생들을 키우셨거든요. 아빠는 거의 평생 감옥에 있었고요. 누구도 제게 어떤 길을 가면 된다고 보여준 적이 없고, 저는 모든 걸 알아서 혼자서 배우고 익혔어요. 자연히 또래 친구들보다도 일찍 철이 들었달까요? 엄마가 일하러 가시면 제가 동생들 돌봐야 했고요. 아, 사실 제가 유일하게 보고 배운 게 있다면 엄마의 삶인데, 엄마가 예전에 노조 만들고 활동하신 적이 있거든요. 제 가치, 행동이 거기서 나온 것도 있겠네요.
아마존에 입사했을 때 저는 이제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고 믿었어요. 돈도 잘 벌고 가정도 잘 꾸릴 수 있겠다 기대가 컸죠. 그런데 아마존은 제 모든 것을 빼앗아갔고, 팬데믹이 계속됐죠. 잃을 게 없던 저는 그렇게 모든 걸 걸고 싸우게 된 거고요.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아는 한 저는 절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요. - 스몰스


스타벅스 바리스타들에 이어 JFK8 노동자들까지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노조는 미국 언론의 핫한 키워드가 됐다. 새로운 경향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순식간에 쏟아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미션 임파서블'을 해낸 이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듣고 전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노동조합의 미래가 어떨지는 사실 모르겠다. 전문가들도 쉽사리 전망하기 어려운 문제일 거다. 자신 없는 주제에 관해선 섣불리 쓰기보다 찬찬히 지켜보려 한다. 노조와 관련한 이야기는 언젠가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에 관해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노조뿐 아니라 수많은 사안에 관해 붉은 바다와 푸른 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는지, 혹은 의외로 얼마나 의견이 비슷한지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여러 가지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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