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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춤에서 무대 위 발레까지

춤 다큐_댄스멘터리

어떻게 춤을 추게 되었는지 종종 질문을 받는다.


흥분한 야구팬 마냥 들떠 떠오르는 장면들을 두서없이 엮어 응축해내면 시간은 가차없이  다시 증발시킨다.


꾸준히 일기를 쓰는 편은 아니라 지나온 춤 이야기는 대체로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난 춤의 서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수 있다.


“춤은 찰나의 예술이며 시간은 춤을 지배한다.”


사라지는 광물이 되지 않기 위해 화석을 찾아 나서는 고고학자처럼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기록하고자 한다.


그 기록을 위해 내 손은 펜과 듀엣을 이루어 또 다른 춤을 출 호흡을 가다듬는다.




 "몸을 도구로 기록 해왔던 춤 서사를 글로 적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은 방송매체를 통해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의지가 없는 것이라는 의견을 접했다.


지난 무대 위에서 내 몸의 언어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대국을 마친 바둑기사처럼 복기해보았다.


나의 춤은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픈, 관객들이 먼저 보고 싶었던 춤이었나.


혹 무대와 객석을 분리하고 발레를 통해 스스로 태양왕이 된 루이 14세처럼 스스로 조명받고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혼자 소유하려는 욕망의 춤은 아니었을까.


나르시시즘이나 자아도취를 통한 자극과 동기부여 또한 다채롭고 의미 있는 삶의 모습이다. 예술 애호가들의 박수는 지금도 설렌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불안은 극장에 발자국 한번 남겨본 적 없는 이들이 내 몸의 언어를 자신들의 삶에서 다시 쓰고 자기화할 때 더 큰 환희로 가셔진다.




클래식 발레에서는 왕자 공주가 무대의 센터 스테이지(공간만이 아닌 극에서 많은 비중을 가지는 역할로서의 위치를 포함하는 의미)에서 머물며 작품의 내러티브를 이끌어 나간다.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에서 Grand pas de deux 장면

이러한 무용극의 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두 무용수가 함께 추는 파드되(pas de deux)이다.


나도 백조의 호수에 철부지 왕자 지그프리트가 되어 영화 블랙스완의 한 장면처럼 극 중에 빠져들어 파트너와 드라마를 만들며 듀엣의 희열로 행복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무대 위가 일터가 되는 순간 감정의 색채가 매번 동화책의 아름다운 파스텔 톤 같지는 않았다.


하나의 클래식 발레 무대를 떠올려본다. 자신의 몸을 가녀린 발끝 하나에 맡겨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파트너의 동작들이 실패하지 않고 또 다치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받쳐 주며 여러 우아한 동작들을 만들어 낸다.


뛰어난 파트너의 춤은 분명 화려하다. 더 우아하고 더 높게 도약하며 혼자서도 많이 회전한다. 파드되의 실수도 없이 극을 마치면 관객은 환호한다.


극장 안의 울림이 역시나 설레게 하지만 한 무대에서 따로 호흡했다는 느낌이 들면 잊지 않고 회의감이 다시 방문한다.




나한테 있어 춤은 나만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기 이전에 가족을 위한다는 책임의 무게 또한 컸다.


영화 빌리 엘리엇의 탄광촌에서 꿈을 꾼 그 소년처럼 춤을 출 때 머리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으면서도 식구들을 위해서 내가 더 몸값이 높은 무용수가 되어야 했고 그러려면 더 높은 수준의 동작을 수행해야 했다.


춤을 추다 보면 세포를 넘나드는 전류들이 움직임의 필름을 모아 영화로 제작해준다.


마치 해외의 다 쓰러져가는 주택 하얀 벽면에 빔프로젝터로 띄운 감성 충만한 불란서 영화같이 중간에 꺼질 듯하면서도 풍성하고 멋스럽다.


하지만 여유롭게 그 영화에 빠져 감상평을 읊기엔 바디 디자인과 테크닉을 화려하게 재정비하는 것이 나와 가족이 생존하는데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 요소들이 성립될수록 박수와 함성 소리는 커지고 찾는 곳도 많아졌다.


어쨌거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짜릿하고 계속 움직이라는 좋은 동기부여가 되지만 “객석에 앉아있는 가족과 친구에게 위로가 되고 생명이 되었는가?” 하는 의구심은 무대를 철수하기 무섭게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다행히도 시간이 몸의 기억을 앗아가는 동시에 의구심의 그림자도 잠시나마 걷어내어 주게 되는데 그때마다 내 몸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정리를 하게 되었다.


더 많은 피루엣(무용수가 쓰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은 상태로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 회전 수와 경쟁의 움직임은 우선 접어두어 보기로.


춤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이질 감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자신의 몸과 온전히 대화하고 마음과도 연결될 춤의 언어를 무대 밖으로 전해보자.


많은 무대 위에서 진심으로 많이 웃고 말로는 도저히 표현 못할 희열 또한 느꼈다.


잘난척하며 내 몸과 움직임에 취해도 보고 갈망하던 테크닉을 체화시키기도 하고 간절히 바라던 단체의 소속도 되어 보았다.


이 기억들은 이미 나에게 머물러있고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언제든 술자리에서 회고하며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생을 마감했을 때 그간의 기억과 경험이 나만의 창고에 머물지 않고서,

종이 위에서 펜과 춤추며 기록된 무보를 통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군가에게 작은 지식이 되거나 하나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두려움 없이 또 다른 무대로 향할 수 있겠다.



춤을 출 때는 한순간도 빠짐없이 가장 당연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관객을 향한 표정들, 몸짓에 싣고 공기를 통해 발산하는 감정 또한 아니다.


바로 호흡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너무도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이 호흡이다.


내 춤 인생에서도 내 목숨 이어주는 숨만큼이나 '生'을 위해서 사람들과 함께 군무(무용수 여럿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 추는 춤)를 하며 나누었던 호흡이 참 중요했다.


화려한 독무 이전에 함께 호흡했던 사람과 기억들을 재조명하고자 펜을 잡은 것 또한 글을 쓰는 이유이겠다.




주변에서 에세이를 쓰게 된다면 사회와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인물, 인플루언서가 되어서 어떤 스토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 의지가 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내고 공유하라고 한다.


아마도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인물 또는 내가 행동한 것들이 큰 확산성을 가지고 전달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삶의 특이점을 기다리지 않고 장시간 펜을 쥐고 있는 것이 익숙지 않은 내 손의 미세한 떨림이 삶을 위해 매일 일어나 생명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울림으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적는다.


이어서 만만치 않은 자본주의의 무대 위에서 스스로 예술이라고 느끼는 무언가를 통해 깃털처럼 도약하고 싶지만 현실의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위축된 이들에게 내 기억들이 정보가 되고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면 즐겁게 펜과 듀엣 댄스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하며 오랜 시간 춤을 출 preparation(춤을 추기 전 준비동작)을 한다.




https://youtu.be/LBAh4-JFsz8

‘이인규 춤도서관’_평생 운동화 발을 위한 발레의 pointe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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