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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아프다

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by 장원희

모든 우리는 아프다. 아픔이 없는 존재가 있을까? 너도, 나도, 하물며 이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러러 받는 기하급수적인 재산을 축적한 이들도 아픔이 있다. 이걸 느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 귀엽게 느껴지면 끝났다는 말이 있다. 예쁘다, 잘생겼다, 같은 표현보다 귀엽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가 실수를 하든 답답한 모습을 보이든 전부 포용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귀엽다’보다 위험한 상태가 있는 듯하다. 바로 ‘안쓰럽다’이다.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과는 다르다. 이 둘은 자칫하면 대상을 나와 완전히 분리해서, 그 아픔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나는 절대 겪지 않을 그 아픔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에 놓일 수 있다. 귀여움보다 무서운 안쓰러움이란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이다. 그냥, 갑자기 그 사람이 아팠을 상황이 떠올라 그 사람을 더 가까이서 알게 되어버리는 마음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모두가 불쌍했다. 나를 힘들게 하던 아르바이트의 사장님도, 내 험담을 하던 친구도, 약속을 밥먹듯이 취소하는 지인도, 싫은 건 그대로였지만 그들의 아픔을 알고 나면 무언가, 단순히 불편하고 싫은 사람을 넘어 그들은 내 안에 좀 더 입체적인 형태로 존재하게 됐다.


내 안에 그저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으로만 남아있을 때의 그들은 마치 전래동화의 악역을 보듯 평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들의 아픔을 어렴풋이 깨닫는 순간 조금 더 입체적인 모습으로 내 안에 남게 되었다. 그냥 지독한 사람과 아주 못됐지만 본인 나름의 아픔은 있던 사람, 이 둘의 차이는 무척 컸다. 아픔은 그들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 내가 알게 됐다.

아르바이트의 사장님 때문에 온종일 눈치를 보고 잠깐의 쉬는 틈도 보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일하다 집에 오면 늘 양다리에 쥐가 나는 일상이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새벽까지 가게를 지키면서 온갖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며, 가장으로서 틈만 나면 자녀들의 일과 관련된 연락을 받는 사장님을 보고 날이 갈수록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곧 그는 하나의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내게 다가왔다.


각종 매체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의 작품에는 아주 많은 악역이 등장한다. 악역의 이야기와 배경도 다양하다. 요즘에는 이런 인물들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말이 흔하게 들려온다. 정당성을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스토리를 주는 것이, 그들의 삶을 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면책권을 주는 의미인 걸까. 그렇다면 악역은 그저 흥부와 놀부의 “놀부”나 콩쥐팥쥐의 “팥쥐어멈”처럼만 남아야 하는 걸까,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서사는 삶이다. 만약 놀부에게, 원래 무척 부유했으나 어렸을 적 크게 사기당해 아주 힘든 삶을 살았었다는 설정을 줘보자.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놀부는 조금 더 입체적으로, 어떤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미워하던 사람의 아픔을 알게 되면 이전보다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식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게 편했다. 내 헛소문을 퍼뜨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원수에서 못됐지만 불쌍하기도 한 사람, 그러고 나면 내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기. 우리는 모두에게 타자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나는, 이 감각이 좋다. 그렇게 지독하던 누군가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 정의할 수 없는 동요가 왔다. 그렇기에 더욱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를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서사를 안 주고 싶은 날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라도, 그들의 어딘가에 ‘아픔’이 있었을 거라 상상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말하지 않은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이 꼭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진 않지만, 가끔, 그런 상상 하나로 내 마음은 조금 더 평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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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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