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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3. 2023

어쩌면 답 정 너

당구장에서 ~ 14

역시 월드클래스다. 한 점 한 점 득점해 나가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숨 쉴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숨이 턱 턱 막힌다는 표현이 적당한지도 모르겠다. 앉아있는 모습마저 카리스마 넘쳐난다. 타석에 들어선 후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평범한 포지션이라도 그냥 엎드리는 법이 없다. 오히려 더 신중하다는 느낌이다. 선구안은 또 어떤가. 눈앞에 손쉬운 공을 쳐도 되는데 굳이 멀리 있는 적 구를 택해버린다.


언제부터인가 지는 경기를 즐기고 있다.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다. 한 번씩 정신없이 쳐대기도 하지만 대부분 머릿속에 당구공만 잔뜩 집어넣다가 끝나버린다. 월드클래스 때문이다. 상대를 압도하는 중후한 분위기 그 알 수 없는 기운은 도대체 어디서 분출하는 것일까.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야 하나. 노력한다면 그나마 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을까. 여러 개의 정답이 날 택하라며 손 흔들고 있지만 문제를 해결해 줄지는 미지수다.


스트로크를 유심히 관찰해 본다. 거의 완벽할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큐 끝이 깔끔하게 뻗어나가는 모습에서 생동감마저 넘치고 있다. 흉내 내 보지만 잘 안 된다. 그들도 분명 하루아침에 되진 않았을 터인데. 복잡한 과정을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르쳐준대도 당구공이 머릿속을 채우려 하지 않을까. 그래도 좋다. 파고드는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치란 말인가. 파고 또 파야 하는 당구, 삶이나 당구나 평생 공부해야 하는가 보다.


깔끔하게 맞춰내는 모습에서 고수와 하수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하수와 시합하다 보면 내가 고수인지 착각할 때도 있다. 한 번씩 월드클래스가 기량 미흡한 선수에게 패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별별 생각을 다 들게 한다. 나도 모를 변수가 도사리는 스리쿠션 경기, 그들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실수할 것 같은 예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에누리 없이 깻잎 한 장 차이로 비켜간다. 틈새를 보고 만 것이다. 어쩌면 실력도 깻잎 한 장 차이가 아닐까.


한국 당구의 이론과 그에 따른 지식은 일본에서 들여왔다. 서유럽과 일본에서 써 내려온 책과 구전으로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한때 세월로 전수된 비법을 정석으로 여기며 모방만이 정답인 줄 알았다. 틈새가 보이면서부터 반항심이 생겼다. 모방을 넘어가 보는 것이다. 나름의 깊이를 탐구하는 여러 선수의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고 동호인들 수준 또한 선수들 못지않은 정교함을 건네주고 있다. 이를 무기로 창조해 보는 거다. 비법들을 모아 모아 하나로 집대성되길 고대하며 그 속에 내 것도 살짝 끼워본다. 


공 하나로 표현력을 다져보면 어떨까. 제 회전(순)으로 굴려보다가 지루해지면 역으로도 굴려보고 시곗바늘 열두 점을 겨냥하면서 연습해 보는 거다. 무 회전으로 빈 쿠션을 돌려 포인트마다 여덟 등분으로 나누어지는 섬세함을 발견했다면 거기에 공 하나를 더 보태보자. 두께를 맞춰내는 단련법에서 공 세 개는 방해가 될 뿐이다. 자신감을 얻었다면 하나의 뒤돌리기 포지션을 두고서 역 · 순 · 무 회전으로 성공시켜 보자. 힘의 가감으로 쿠션과 볼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연습법이 없는 것 같다.


추억을 더듬어보니 사부가 내게 가르친 것은 요령이 전부였던 것 같다. 유심히 지켜보면서 상황에 따라 하나씩 던져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라. 그렇다. 주로 느낌으로 요령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옷깃을 스칠 듯 말 듯 · 끌어당기는 느낌 · 눈감고 친다는 느낌 · 멀리 있지만 가까이 있다는 느낌 · 공이 붙어 있는데 떨어져 있다는 느낌. 느낌이 감정으로 전달되어 감정을 잘 다스리는 일이 스트로크 작용이었다니.


마음이 편해야 당구가 잘 되듯이 알고 덤비는 것과 모르고 덤비는 차이에서 편안함의 범위가 결정되는 것 같다. 자신 없음은 모른다는 소리다. 모름이 긴장감을 불러오고 수습하기 위해 거짓을 빌려와야 한다. 요행을 바라는 꼼수로 한순간은 모면하겠지만 이어지기는 힘든 일이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분석하고 연구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겹도록 외로운 작업이지만 또 다른 즐거움을 건네주기도 한다. 오늘도 잠에서 깨어나 달아나는 정답을 잡으려는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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