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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7. 2023

찌르는 삶

당구장에서 ~ 31

“당구 한게임 할까.” 항상 듣는 말이지만 언제 들어도 정겹게 다가온다. 오가는 대화에서 당구라는 녀석이 불쑥 튀어나온다면 어찌나 반갑던지. 애당인(愛撞人)이라면 나의 일인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지 싶다. 하루 일을 마칠 무렵이나 조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짧은 여유는 주저할 틈이 없다. 샤워를 후딱 해버리고는 허겁지겁 저녁을 먹게 된다. 당구장에 달려가기 위해서다.


오늘은 누구와 매칭이 될까. 문을 조심스레 열어본다. 예의 없는 동호인을 만난다면 그날 기분은 꽝이다. 요리조리 잘 피한다지만 어쩔 수 없이 쳐야 할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다행히 눈에 띄지 않는다. 사냥감을 고르기도 전에 주인이 먼저 주선해 주신다. 누구일까 했더니 어제의 설욕전이다. 아슬아슬하게 져버렸던 일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키득거리기 바쁘다. 졌지만 기분 좋았던 친구였다. 머릿속 기억을 팔에 저장시키며 오늘은 기필코 이겨야겠다는 다짐으로 경기를 시작해 본다.


마냥 정겨울 것 같은 당구는 출발과 동시에 상황이 돌변해 버린다. 즐겨야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다. 주위의 고요함이 나를 압도하고 분위기는 진중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당구대도 난잡함을 원치 않는 분위기다. 오직 정적을 꿰뚫는 당구공 소리만을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행동마저 조심스럽다. 손에 든 검(큐) 또한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서슬 퍼런 위압감으로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자비는 없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외 없이 울고 웃는 갈림길로 돌아서야 한다. 혹시나 너그러움을 드러낸다면 가차 없이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행여 용서를 생각한다면 죽음은 나를 향해 다가올 수도 있다. 운명의 승부는 무승부가 없으며 다음으로 미룰 수조차 없는 노릇이다. 잘못 쳤다고 또 한 번 찌를 수도 없고 내가 약하다고 패거리를 몰고 오지도 못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공격과 수비를 생각하고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해 한 점 한 점 득점을 충실히 쌓아나갈 뿐이다.


게임이라는 용어는 놀이를 통칭한다. 거슬러 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용어다. 놀이와 스포츠 개념을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일상의 직업 모두를 포함할 수도 있다. 대통령 놀이, 검사 놀이, 노숙자 놀이, 의사 놀이, 등 공인들의 직업도 놀이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미 오래전 서양 학자에 의해 정의 내린 바 있지만 이제야 수긍하는 문화의 흐름인 것 같다. 세상 모든 움직임이 놀이인 셈이다.


어원을 찾아보니 경기 · 기쁨 · 환락 · 재미 · 희락 · 흥겹다 · 뛰다 ·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원초적으로 사냥과 밀접하다고 한다. 다소 의아했지만 사냥이라는 의미를 수긍한다면 해석이 좀 더 자유로워진다. 유아적 상상으로 사냥을 나가보자. 영장류의 지능과 지구력이 단연 돋보인다. 짐승의 이빨과 발톱을 피해 가면서 창으로 급소를(타격 당점) 찔렀을 것이다. 도끼로 난타한 먹잇감을 동굴로 가져와 모닥불을 지피며 고기를 굽는다. 주위는 엄마와 아이들이 침 흘리며 빨리 익어가길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의 무용담으로 하얀 이빨이 감춰지지 않는다.


사는 것도 게임과 많이 닮는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살 수밖에 없는 뭐 그런 의미로 말이다. 자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죽음을 창조한 것이라고 한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다. 이 과정에서 가족을 위한 의무감을 울러 메고 사냥을 나서는 내 모습. 먹잇감을 포획하여 나누던 시절은 이미 잊혔다. 법의 강제성과 동정을 유도한 나눔만이 공존할 뿐이다.


여기 두 종류의 냉장고가 있다. 썩지 않는 특수 냉장고와 언젠가는 썩어야 할, 썩을 수밖에 없는 냉장고. 저장하기를 반복하는 냉장고는 썩지 않는다. 오직 쌓이기만 한다. 산업혁명을 고대하는 두뇌들이 활동한다지만 부의 위치만 바뀔 뿐 고르게 배분할 수 없는 일이다. 지구의 위기를 직감하는 공동체의 움직임이 활발하더라도 영원히 작동하리라는 보장도 못한다. 남은 자원을 모두 써버리는 것을 지켜볼 뿐.


오늘도 안녕의 보금자리에서 냉장고를 열어본다. 억지로 웃음 드러내는 자신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하얀 이빨이 드러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땐 가슴속 빈 곳이 잠시나마 메워진다. 오늘도 무사히 사냥을 마쳤으니 당구 한게임을 즐기러 가야겠지. 또 어떤 상대가 날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당구도 찌르는 종목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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