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잊어버렸던 당구가 내 눈을 멈추게 한다. SBS 방송이 개국하며 세상이 정신없이 변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TV에서 나비넥타이가 팔랑거린다. 새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기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손에 큐를 쥐고 있다. 소문으로만 듣던 외국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믿기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월드컵 당구대회다. 한때 저 속에 내 모습을 그려 넣었기 때문에 더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연이어 부산에서도 PSB 방송국이 생겨나자 때맞춰 당구 중계가 펼쳐졌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서 카메라 앵글이 조준되자 선수들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회장님과 유심히 지켜보니 선수들이 득점할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다.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손쉬운 포지션도 제대로 맞춰내지 못한다. 당장이라도 ‘큐’ 사인이 날 것 같은 긴장감은 선수들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걱정도 잠시 내게 당구공을 건네주며 얼른 화장실에서 씻어오란다.
총알같이 달려갔더랬다. 새 천은 기름 성분 때문에 당구공이 제 각대로 표현되지 않고 축 미끄러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회전 속도도 빨라 공 잘 다루는 선수들도 애를 먹기 마련이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난 고백이다. 비누로 정말 뽀드득 소리 날 정도로 씻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공에 침을 뱉고는 골고루 문대어 가져갔더랬다. 때가 많이 묻을수록 미끄러짐이 줄어든다는 사실은 초보자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뒷일은 기억에도 없다. 그렇게 ‘국제식 대대’를 세상에 내보내게 되었다. 괴물같이 큼지막한 당구대에 엎드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보여야지 감각으로나마 쳐보겠는데 눈 감고 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대대에서 치다가 중대에서 치면 장난감 같았다. 섬세한 맛을 느껴서인지 좀 칠 줄 안다는 거들먹거림에 중대를 멀리하기도 했다. - 구질 표현은 중대나 대대나 똑같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세월이 흐르면서 대대를 들여놓은 구장도 몇 군데 더 생겼다. 주로 두 대에서 세대 정도를 갖춘 규모로 중대와 혼합 구장이다. 요즘처럼 대대 전용구장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구선수라는 명목도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뜻을 모은 동호인들이 리그전을 열었으며 툭하면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교류전이 펼쳐졌다. 비록 그들만의 리그였지만 시합 복장을 엄수하며 진지한 태도로 기량을 내뿜었다. 하늘 같은 에버리지 1점대를 부러워하며 ‘쉬운 공을 빠뜨리지 말자’ ‘길 공 잘 치는 사람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뭐 이런 조마조마한 구호를 외치면서~
최근 그 시절 선배를 TV에서 보았다. 프로 2부 토너먼트였지만 그 나이에 우승은 대단함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마침 당구장을 개업하신다길래 먼 걸음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강산이 세 번씩이나 변했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려나. 가물가물 기억의 모자이크를 맞추며 찾아뵀더니 * “내 이 뭐 하려고 당구를 쳤는지” 하소연이 빗물이다. 돌고 돌아 결국 당구장이란다. 긴 예기가 필요치 않았다. 당구만 치다 내려왔다.
오늘따라 비바람이 변덕스럽다. 태풍 비라 그런지 소리도 제멋대로다. 시끄럽게 쏟아지다가 잔잔하게 내리다가 때로는 눈가루처럼 사뿐히 허공을 나는가 싶더니 이내 바람 따라 흩어지고 만다. 비껴가는 태풍을 맡으며 대지의 빗방울을 조심스레 훔쳐본다. 제까짓 것도 빗물이라고 미꾸라지 기어가듯 물고를 튼다. 실개천을 향하는 모습이 마치 목적구를 향하는 내 공 같다. 빗물에 사유를 던져보니 바다가 종착지다. 얼마나 쪼그렸던지 다리가 저려온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라고, 그 길 잃을까 쳐다봤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