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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Jun 25. 2024

프로대출러의 탄생

▣ 대출 도서 반납 예정일 안내 ▣

너 님께서 대출 중인 도서 반납예정일 안내입니다.   

도서 대출 도서관 : 00 도서관

대출 도서 상세 : 

    ■ 도서대출일 : 2024년 06월 04일 

    □ 반납예정일 : 2024년 06월 25일까지 

    □ 대출 도서명 : 이 책 저 책 총 4권

문의 전화 : 0311234567

(중략)


도서관에서 카톡이 왔다. 빌려간 책을 돌려만 준다면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준엄한 경고였다. 2주면 4권은 읽는다며 자신감 있게 빌려왔건만 겨우 한 권을 완독 했다. 대출연장하고 최대한 읽어야겠다며 반 권 더 읽었다. 이 사태에 대해 그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다. 한 사람만 빼고. 거울을 보며 변명을 좀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못 읽은 건 못 읽은 거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책을 다 못 읽은 걸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으면 딱 좋겠다. 책이나 실컷 읽게.


기어코 반납예정일이 왔다. 부산하게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책 반납할 것이 생각났다. 마침 걸으려 나가려던 참이어서 도서관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누가 보면 책 많이 읽는 줄 알겠네.’ 책 4권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사실 어디 가서 독서모임 클럽장이라고 소개할 때마다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긴 했다. “와 그럼, ‘전쟁과 평화’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도는 당연히 읽으셨겠네요?”라는 식으로 나를 대단한 독서가로 생각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할 때가 많았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키오스크 앞에 섰다. 그런데 막상 반납 버튼을 누르려니 한 권이 마음에 걸렸다. 반 밖에 못 읽었는데, 이번에 반납하면 다시 집어 들기는 힘들지 싶었다. 또 한 권이 나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평소에 꼭 읽어보리라고 다짐했던 책이었다. 그래서 모든 책을 반납했다. 그리고 그 두 권을 다시 대출했다. 참담한 기쁨이었다. ‘아니, 읽는다니까? 나 읽는 사람이잖아. 변명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마음속으로 변명을 읊조리며 도망치듯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른 책 한 두 권 더 빌려갈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2권은 들고 걸을 만 한데, 3권은 좀 힘들 것 같았다. 책을 양손으로 들고 만보를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욕심쟁이 주인을 만난 불쌍한 몸뚱이는 학을 떼며 책을 편하게 들 궁리를 했다. 곧 최적의 방법을 찾았다. 책 모서리 쪽을 움켜쥐고 축 늘어뜨리면 무게 중심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책 등 쪽에 손가락을 펼쳐서 고정하면 팔을 흔들며 빠른 속도로 걸어도 안정감이 있었다. 걸을만했다.


‘오! 이걸 글로 쓰면 되겠네!’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책 욕심 때문에 몸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팔을 딱 붙여서 고정했다. 폰을 열고 걸으며 글을 써 내려갔다. 문장 중간중간마다 눈을 들어서 전방을 확인하랴, 생각나는 거 옮겨 쓰랴, 손가락에 살이 쪄서 오타 나는 거 지우랴 난리도 아니었다. 어두운 저녁 휴대폰에 뭘 쓰느라 고개를 처박고 책을 옆에 끼고 경보에 가까운 속도로 걷는 걸 보며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안다. 아내는 항상 이야기한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에게 관심이 없다고. 그래도 글의 흐름상 모르는 척해주자. 여기까지 걸으면서 글을 썼는데 아직 7 천보 더 걸어야 한다.)


책 좋아한다면서, 읽지는 않고 대출만 연장해 대는 스스로에게 별명 하나 붙여주고 싶다. 프로대출러라고. 책을 들고 만보를 넘게 걸었던 것은 잊은 채, 앞으로 3주 동안 책을 다시 책상에 쌓아둘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는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 책들만 보면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을 차리려면 한참 멀었지 싶다.


+추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책 빌린 거 집 우편함에 넣어두고 걸었어도 운동에 큰 지장은 없었을 것 같아서 씁쓸하다.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에 대해, 모임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트리로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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