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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Jul 17. 2024

비상대응체제

[모라도 클럽] 다섯번째 숙제 (주제 : 나만의 시간)


“수족구다!!”

아이의 손과 발에 수포가 올라왔다. 체온은 37.8도였다. 아내의 표정은 굳었고, 내 인생은 멈추었다. 수족구는 비말로 전염되는 질환이다. 완치확인서를 받을 때까지는 아이를 격리 수용해야 한다. 보통 그 기간이 4-5일 정도 걸린다. 즉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 가족은 수족구 비상대응체제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이가 수족구에 걸리면 유치원에 가지 못한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 그를 돌보아야 한다. 산책도 어렵다. 다른 아이들에게 전염될 수도 있으니 집 안에 머물러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족구에 걸렸다고 아이의 에너지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이의 수족구 간호는 전쟁과도 같다. 비상대응체제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달려와서 몸통 박치기를 한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아침이 왔다. 아내는 이미 일어나 식사 준비를 마쳤다. 씻고 나오면 아내는 출근 준비 중이고 아이는 밥을 안 먹는 중이다. 입이 아픈 병이라 이해는 가지만, 아침부터 씨름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밥을 잘 먹어야 튼튼해지지!”

그래도 아침 상이 가벼워서 금방 다 먹는다. 그 사이 엄마는 떠났다. 이제부터는 무한한 놀이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아이는 꼭 “아빠랑 같이”라는 표현을 덧붙이며 이런저런 놀이를 제안한다. 아빠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아이는 함께 노는 게 좋나 보다. 매번 똑같은 놀이를 하면 지겹다. 그러니 나와 아이가 함께 즐길만한 새로운 콘텐츠를 창출해 내야만 한다. 잠깐 화장실에 들어가거나, 집안일을 조금씩 하겠다고 감시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아들은 선풍기를 넘어뜨린다든지, 개어놓은 빨래를 모조리 펼쳐놓는다든지, 방문을 닫고 컴퓨터 의자에 서서 점프를 한다든지 하는 기행을 펼친다. 오, 이 주체 못 할 무한한 개구쟁이 에너지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러다 점심때가 오면 TV를 틀어주고 식사 준비를 한다. 내가 먹을 밥이 뭔지는 아이의 식사를 먼저 챙겨보면 알게 된다.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돈까쓰, 아내가 무쳐놓은 브로콜리와 카레 조금, 버섯은 빼고 두부 몇 개를 넣은 된장국을 차린다. 내 식사 메뉴는 내일이면 쉴지도 모르는 카레와 된장국이다.

아이는 요즘 헬로카봇을 보는데, 아빠는 그 내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도 별로고, 스토리도 찝찝하다. 하지만 보여주지 않을 수는 없다. 다른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될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로봇이 변신할 때마다 흥분해서 달려온다. “하아앗!” 기를 모으는 소리를 내며 음식 준비하는 내 엉덩이를 주먹으로 쳐댄다. 음식 차리는 게 서툴러서 정신이 없는 아빠의 눈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면 슬슬 뒤로 내빼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거 까지만 보고 밥 먹을 거야!”

예전엔 밥을 차리자마자 TV를 꺼버렸다.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도 한참 보고 있는데 꺼버리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항상 아이에게 ‘시청종료 예약’을 건다. 음식도 식힐 겸, 보던 것도 마무리할 겸 기다리다 보면 식사 전쟁이 시작된다. 아이가 유치원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느라 안 그런다는데, 집에서는 밥 먹을 때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자유를 만끽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빠는 아이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자유보다는 밥이 더 중요한 가치니까. 아이에게 갖은 권모술수와 협박과 회유를 반복한다. 밥을 잘 먹지 않으면 같은 반 민서가 실망할지도 모른다거나, 선생님에게 얼마나 잘 먹는지 말해줘야겠다는 거짓말을 남발한다. 한 숟가락을 입에 물면 세상에 이렇게 밥을 잘 먹는 멋진 아들은 너밖에 없다며, 너는 최고라며, 밥을 잘 먹으니까 일주일 안에 꼭 나을 것 같다며 과장된 연기를 한다.

그렇게 밥을 다 먹이면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것처럼 지친다. 그러니 낮잠을 꼭 재워야 한다. 하지만 아이는 틈을 노려 그동안 참았던 놀이들을 할 기회만 보고 있다. 싱크대에 그릇을 가져다 놓는 사이 그는 내가 읽어줘야 할 책을 이미 골라놓았다.

“잠깐만! 아빠 정리 좀 하고!”

나는 책을 들고 졸졸 쫓아오는 아이를 따돌리며 블라인드를 내리고,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정리한다. 아이에게도 책 읽기 전에 어질러진 것들 정리하자고 한다. 그러면 아이는 드러눕는다. 책은 내팽개치고 이제부턴 누워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 것이니 나를 건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때쯤 되면 나도 인내심이 없어져서 소리를 버럭 지르곤 한다. 자기 마음도 몰라주고 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아빠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발사하는 아들. 겨우 몸을 일으켜 흐느적흐느적 장난감을 치운다.


“이제 잘 시간이야. 아빠 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는 얼른 이불에 드러눕는다. 아이는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며 항의하기 시작한다. 잘하면 변호사를 불러 고소까지 할 기세다. 나는 이불속에서 “아빠 안아주세요!” 하고 애교를 부린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을 돌이켜 아빠의 따가운 수염에 희생당하러 가까이 온다. 이때부터는 누워서 굴러다니다가 우연을 가장하며 나를 때리기 시작한다. 몸을 돌려 누우면서 팔을 휘두르면 그 궤적만큼 힘이 붙는지 맞으면 너무나 아프다. 매 맞는 아빠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이다. 고통스럽다. 좀처럼 잘 생각이 없는 아이에게 또다시 갖은 권모술수와 협박과 회유를 반복한다. 자고 일어나면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네가 좋아하는 간식이 제공될 것이며, 엄마가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이때 잠이 들어준다면 2시간 정도는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특히 잠에 들까 말까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기라도 했다면? 30분은 더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그런 식으로 3시간이 지나간 적도 있다. 오히려 내가 잠들었다가 아이의 발길질에 깬 적도 많다. “안자?” “잘 꺼야!!!”라는 문답을 50번을 넘게 했는데도 잠을 안 자는 날은 어쩔 수가 없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

“안 잘 거면 거실에서 혼자 놀이해.”

그러면 아이는 대지를 박차고 일어나 거실에서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놀잇감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아빠! 우리 같이 자석블록놀이 할까요?”

나 님이 원하는데, 아빠 네까짓 게 뭐라고 내 말을 안 들어주겠느냐는 기대와 확신이 가득한 그 말을 들으면, 나도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블록놀이를 하다 보면 나의 창의성이 발달된다. 유익한 시간이다.


엄마가 오면 상황은 조금 나아진다. 엄마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무더위를 뚫고 퇴근하지만, 아이는 엄마가 오면서부터는 아빠를 내팽개친다. 이제 모든 건 “엄마랑 같이” 해야 한다. 아빠가 뭔가 끼어들 낌새가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엄마도 쉬어야지. 아빠는 또다시 갖은 권모술수와 협박과 회유를 반복한다. 엄마한테 아까 점심때 밥을 멋지게 먹었다고 알려줘라. 아빠랑 유튜브로 자동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자. 그렇게 아이의 주의를 돌리면 이제는 밀린 집안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둘 다 지쳐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시간은 흘러 이제 아이가 잘 시간이 다가온다. 아이에게 알아서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로봇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과학기술이 거기까지 발전하지는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 AI가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 아이가 아직 안 자는데. 씻기 싫어서 한번 울고 나면 카타르시스가 일어났는지 말을 잘 듣는다. 후다닥 씻기고 로션 바르고 아이를 방에 집어넣고 불을 끈다. 잠을 일찍 자면 다행이다. 잠투정을 하면 11시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새벽에 짜증을 내며 혼자 일어나기도 한다.


아이가 잠들면 그때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컴퓨터 방에 앉아 여유로운 음악을 켠다. 불이 켜져 있으면 아이가 자꾸 자다 말고 일어나 달려오기 때문에 에어컨을 포기하고 방문을 닫는다. 이제 인터넷을 좀 확인하다가 뭔가 해보려고 책이라도 펼치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에라이. 오늘도 끝났네.”

잠자리에 누우면 휴대폰을 보는 눈도 감긴다. 그러면 곧 아이가 달려와서 몸통 박치기를 한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아침이 왔다.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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