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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Jul 28. 2024

치킨 시킬까?

운동을 마치고 씻고 자리에 앉으니 저녁 9시 반. 기온도 습도도 높은 동남아 날씨에 운동을 하고 나니 무척 출출했다. 누구나 격하게 공감할 만한 그 갈등이 일어났다. 치킨을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너무 먹고 싶지만, 먹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먹고 후회할까 아니면, 먹지 않고 고통스러워할까? 아내에게 의향을 물었다.

“치킨 시킬까?”

“그럴까? 뭐 먹을 건데?”

뭐라니. 내가 치킨을 시키자고 할 때는 단 한 가지 메뉴밖에 없다. 자담치킨 순살마일드맵슐랭반반. 물엿 베이스에 적당히 매운 맵슐랭 소스가 묻은 바삭바삭한 치킨이라니,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 아닐 수가 없지 않은가? 소스를 하나 추가하면, 부먹과 찍먹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이 정도면 무조건 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막상 아내가 먹자고 하니, 먹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아니야. 그냥 안 먹을래.”

“뭐야! 장난해?”

장난은 아니었다. 진심이었고, 솔직하게 말했던 것뿐이다. 보통은 여기서 내가 ‘이상한 놈’ 취급을 받으며 대화가 끝난다. 내가 봐도 내가 이상한 놈이라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상황은 종료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내의 성토가 시작되었다.

“아니, 오빠.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원하는 게 뭔데? 치킨 먹고 싶어서 말 꺼낸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안 먹을 거면 나한테 왜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내가 안 먹는다고 했으면, 나 때문에 치킨 못 먹는다고 구시렁거렸을 거 아냐? 어쩌라는 건데? 이런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아내의 말을 듣고 있다가 걷잡을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아내의 성토에 나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와! 나는 정말 미친놈이구나?”

아내의 말이 47,000% 맞았다. 먹고 싶으면 먹든지, 싫으면 말든지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결정하면 비난하다니. 아내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노릇이다. 생각도 없던 치킨에 입맛만 다시게 하다니, 말 그대로 ‘맞아도 싸다.’


이 문제가 결혼 10년 차가 넘은 지금에서야 불거진 이유는, 둘 다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내가 얼마나 치킨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치킨 시킬까?”는 내 입에서 날숨처럼 나오는 말이었다. 먹는다고 했다가 번복하는 것도 짜증은 났지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핵심은 치킨을 먹느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중구속 메시지(double bind message)’다. 상호 모순되는 두 요소를 다 만족시킬 것을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항상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넌 똑똑한데, 왜 이 문제도 못 푸니?”

“잘했어. 하지만 너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걸 기억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솔직하게 네 마음을 말해봐. 소리는 지르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 너무 자만하지는 말고!”

이 상황에서 나는 치킨을 먹으면서도 살도 찌고 싶지 않았다. 둘 다 원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아내에게 그 결정을 미루었다. 아내가 결정을 내리면 반드시 불만이 생겼다. 아내가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조를 깨닫고 잠깐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중 메시지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괴롭혔다. 대표적으로 “많이 먹고, 살은 찌지마.”가 있었다. 많이 먹으래서 많이 먹었더니, 살이 쪘다고 핀잔을 주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이 부당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성인이 되었다. 이중메시지는 내 심리 구조에 공기처럼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중메시지라는 사실을 의식해 내기는 쉽지 않았다. 마치 어릴 때부터 안경을 꼈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도 안경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국 이 문제에 있어서는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내가 이중메시지를 사용할 때마다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깨닫기만 한다면 언제든 마음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또 애초에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치킨 먹고 싶어, 그런데 살찔 거 같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내에게 연습해 보았다. 내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묘사할 수만 있다면, 이중메시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오늘의 갈등은 철저한 자아성찰 끝에 마무리되었다. 치킨을 시켜 먹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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