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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뉴 Jul 10. 2019

알다시피, 은열 : 서발턴을 상상하다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X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정세랑, 「알다시피, 은열」, (2011)


정효는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역사학도로, 우연히 사료 한 귀퉁이에서 만난 가왜무리의 존재와 ‘은열’이라는 인물, 일본인 시로와 중국인 창랑의 관계에 흥미를 느낀다. 빈약한 사료를 바탕으로 무한한 상상을 펼쳐가며 논문인지 픽션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한중일 서로 다른 국적의 관계를 아우르고 있는 범아시아적인 새로운 관계에 관해 관심을 갖지만 논문으로 나오기엔 턱없이 자료가 부족하고, 정효는 그저 자신의 상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며 은열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동시에 정효는 ‘R.dashifi(알다시피)’라는 취미 밴드에서 키보드 연주를 맡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밴드를 계속할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밴드에 일본인 타케루, 대만인 오샤완, 호주인 케이제이가 들어오면서 ‘알다시피’는 ‘은열의 섬’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툴지만 간절한 음악을 만들어가게 된다.


은열은 누구인가?     


은열과 그 휘하의 무뢰한들은 실제 왜인과 청인들을 끌어들여 서쪽 섬들을 잠식하여 그 위세가 두려울 정도다.


정효는 얼마 되지 않는 사료들에서 은열의 흔적을 찾아내고, 시대상황에 대한 짐작과 자신의 상상을 통해 은열을 복원해나가려고 한다. 그렇다면 은열의 기록은 왜 그토록 부족했을까?


은열은 고아였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홍경래의 난에서 살아남은 고아였다. 고아들을 모두 이끌던 고아였다. …(중략) 내 머릿속에서, 당시로선 진보적이고 파격적이었던 가치들을 조용히 빨아들이는 소녀가 떠나질 않는다. 그렇다. 소녀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은열은 여성이었던 걸로 보인다. 홍경래의 난이 끝나고 가담자 2983명 중 여자와 아이를 뺀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당했다. 그때 은열은 여자였을까, 아이였을까. 정확한 생몰년을 모르니 그 가운데쯤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정효의 추측에 따르면 은열은 고아이자 소녀였다. 봉기를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았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이이자, 또 무뢰한들이라 여겨지는 고아들의 맏언니였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던진 질문에 대해 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는 지배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역사 서술의 대상도 지배계급이었고 서술의 주체 또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다. 왕조사를 비롯해 영웅의 역사, 승자의 역사만 있고 패자의 역사, 민중의 역사는 찾기 힘들다. 그리고 그 서술 방식은 역사 속의 많은 사건들을 인과적인 것으로, 역사는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으로 그려낸다. 특히, 여성은 비가시화되어 전반적인 역사 서술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성차별의 메커니즘 속에서 적절하게 포착되고 있지 않다. 근대 이전에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으며, 근현대 들어와서야 여성들이 사회적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 하더라도, 이 역시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로 치부되어 공식적인 역사 서술에서 다룰 수 있는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인 등)은 인도의 역사가들에 의해 하위주체(subaltern)로 호명되었는데,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따르면, 서발턴이란 지배 계급에서 제외된 하위주체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상황 아래에 놓여 의견을 내고 있거나 말하려 노력해도 그녀(스피박은 특히 제3세계 여성을 말한다)의 말은 전달되지 않기에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위주체(subaltern)로서의 은열. 그래서 아무도 기록해주려고 하지 않는, 역사적 주체가 되기 어려운 존재로서의 은열의 기록은 찾기가 더욱 쉽지 않았던 것 아닐까? 창량과 시로와 달리 은열의 유해와 은열의 섬에 있었던 아이들의 행방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정효 또한 은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보다, 창량과 시로에 대한 기록에서 은열을 막연하게 떠올릴 뿐이다. 어쩌면 이런 빈약한 사료들이 오히려 정효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정효는 은열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또 상상할수록 그녀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은열에 대한 집착에 가까워져 스스로 이를 페티시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 같다.


시로를 쫓으면서 어째선지 나는 돛대 그물에 앉아있는 은열, 달빛, 복사뼈의 이미지를 되새겼다. …(중략)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프게 아름다운 복사뼈…… 거기에 이르면 절망하고 만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얻은 게 페티시뿐이라니, 자기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학자로서의 재능은 이렇게나 함량 미달인 걸까.



은열을 복원한다는 것


정효의 상상력이 가미된 은열의 이야기는 ‘사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역사학 논문으로 통과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효의 상상 속에서 투사된 은열은 더 구체화되고 뚜렷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설에서 은열의 무리는 선박 보호사업을 하는 해상 무장세력이자 전문 연희단으로, 정착생활을 꾸리는 무정부 공동체로, 마침내 극락으로 보인다.


“윤회의 바퀴가 셀 수 없이 돌아 본래의 육과 혼이 먼지만큼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함께 있고 싶은 이들과 함께 있다면 그곳이 극락이다”정도인데 만족감이 엿보인달까. 행복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정효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여백은 채울 수 없고, 채워서도 안되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규정지을 수 없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비웃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조각 사이를 매우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보게 된다. 있었던 사실만 아무리 나열한다고 한들 그것이 역사가 되는 것일까? 사실과 진실이 일치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 또한 목격한다.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진실의 유무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전혀 다르게 할 수 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는 데에는 사실 그 자체보다 진실에 다가가는 해석이 더 유효하다. 역사는 사실 그 자체를 옮겨놓는 것보다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의의를 가지는 것 아닐까?


은열은 유구한 혁명정신의 계승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여성 영웅에 아나키스트였다고. 은열들의 독특한 범아시아적 우정을 재현하는 게 우리 세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신분제의 벽을 넘어서서 만국의 고아들을 거두며 이상적 공동체 생활을 영유했으며,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예술형식을 실험했던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좌초당하지 않았다면 근대의 선구자들이 되었을 푸른 젊은이들이었다고!


가야트리 스피박은 말할 수 없는 그들, 즉 서발턴의 역사를 써내려감을 통해 타자에게 진정성이나 목소리를 주면서 이들을 주체로 공고히 하는 과정 속, 기존의 역사를 구성하는 헤게모니들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정효는 은열에 대한 자신의 상상이 너무나 영웅적이어서 그 아래에 있었던 수많은 서발턴들의 이야기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닐까 회의하기도 하지만, 결국 정효는 기존 남성 영웅 중심 역사학의 헤게모니를 뒤집을 은열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은열, 사실도 진실도 아니라 할지라도


타자를 만나기 위해 가야트리 스피박이 제안하는 것은 “말을 걸기”와 "상상하기"이다. 바로 다른 자아, 그 존재 방식과 관계 맺고 대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스피박은 서발턴과 ‘내밀한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 책임과 의무에 바탕을 둔 윤리성이 확립되길 주문한다. 이를 ‘윤리적 개별성(Ethical singualarity)’라 부르는데, 이 용어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사랑이란 바로 노력이다. 그것은 매우 세세하게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양쪽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고, 순간적으로나마 실천될 수 있는 윤리적 개별성의 실현 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집단적 노력이 법, 생산관계, 교육체제, 그리고 의료체제를 바꾸게 될 것이다. (중략) 윤리적 개별성이란 비밀스러운 만남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양쪽으로부터 반응이 있는 경우 가능해진다.”     

(Spivak, 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 pp.383-384)


끝내지 않아도 괜찮겠어?
그건 그런 문제가 아니지만, 어쩐지 그런 문제처럼 느껴졌다.


스피박의 입장에서 정효를 바라본다면, 은열에 대한 정효의 집착은 역사적으로 배제된, 그러나 이상적 공동체를 꿈꿨던 여성 주체에 대한 사랑, 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은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던 정효의 작업은 ‘죽고 없는’ 은열을 상상하는 동시에, 가능한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정효에게 있어서 은열의 이야기는 끝내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였을 것이다.


또, 스피박은 윤리적 개별성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문학 읽기를 강조하는데, 문학이 가지는 입증 불가능성을 통해 '텔레오포이에시스(teleopoiesis,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힘)'를 배양함으로써 특정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지식 생산으로 비롯된 의미의 고정성과 확실성을 거부하고, 서발턴의 목소리를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정효가 은열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알다시피 밴드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 ‘음악’을 매개로 소통하고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밴드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볼 때, 또 우리가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에서도 느꼈듯이, 음악 또한 문학과 같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소설 속에서 은열의 이야기는 논문으로 통과되진 못했지만, 알다시피 밴드의 창작곡 ‘Slow Burning’이 되어 공연 때마다 불려졌다. 바로 이것이 정효가 논문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은열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은열에 대한 정효의 상상이 역사적 사실로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논문일지라도 노래로 만들어지지 말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한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섰다. 한 토론회에서 아베 총리는 이 조치에 대해 “한국이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사실상 무역 보복 조치임을 인정했다. 양국 간 근현대사와 관련한 논쟁이 다시 한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시점에서, 정효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 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정효의 작업과 현실에서 동시에 드러나는 범아시아적 연대의 모습


정효가 연구하고자 했던 ‘은열’의 이야기와 정효가 속해있었던 ‘알다시피’ 밴드는 모두 범세계적 연대를 드러내고 있다. 아마 이 특징이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코즈모폴리턴을 동경하는 정효가 두 대상에 애착을 갖게 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그동안 아시아는 유럽 대륙의 사유에 의해, 또 미국의 아시아 프로젝트에 의해 서구 식민주의의 대상으로 정의돼 왔다. 그런 만큼 스피박은 이제는 서구인들의 아시아가 아닌 우리의 아시아를 상상하는 훈련을 하자고 주장한다. 스피박의 아시아 상상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고정된 정체성에 따른 권역적 구분에 맞서고 경제 협력 중심의 권역화(regionalization)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알다시피, 은열」은 단순히 전지구화로 인해 통일된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관점을 견지한 채 아시아 내부의 각각의 차이들을 상상하고 존중하며 배울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은열의 무리’는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다국적 집단이었고, 각자의 언어를 존중했고,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어냈다. ‘알다시피’ 밴드 또한 서로 다른 국적의 인물들이 ‘음악’으로 모여 연대하고 각자의 역사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지지를 보낸다. 이러한 모습들이 아마 스피박을 포함한 서발턴 연구자들이 상상했던 범아시아적 연대가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그린비, 2013
박종성 지음,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푸코, 파농, 사이드, 바바, 스피박」, 살림출판사, 2006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문화이론 연구회 옮김, 「경계선 넘기 : 새로운 문학연구의 모색」, 인간사랑, 2008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다른 여러 아시아」, 울력,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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