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밥벌이 하고 시민기자까지... '글복'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가
2025년 8월 18일,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 코너에 첫 기사를 송고했다. 전송 버튼을 앞에 둔 내 오른손 검지는 꽤 비장했다. 길게 뻗어 콧등을 만지고, 인중을 스치고, 두 마디를 접어 턱끝에 괴었다가, '그래 결심했어'를 마음 속으로 외치며 마우스 왼쪽 버튼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삼성전자 주식 30주를 11만 8천 원에 매도했던 순간보다도 더 비장했다(2월 20일 현재가 19만 원, 그때는 비장했으나 지금은 비수가 되어 꽂힌다).
[관련기사 : '응석받이' 쉰둘 딸은 여전히 엄마를 나누고 싶다]
첫 기사의 주인공은 '엄마'였다. 곰국처럼 진한 엄마의 사랑을 쓰려했는데, 엄마의 등골을 빼 먹는 응석받이 딸이 쓴 참회록이 되어버렸다. 전송한 기사가 '검토 전'에서 '검토 중'으로 바뀔 때까지 내가 클릭한 조회수만 무려 스무 번.
조회수를 억지로 끌어 올리는 자작극 같아 민망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오후 내내, 내 글은 생나무에 걸려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근 무렵에는 청천벽력 같은 문구로 바뀌어 있었다.
'배치대기'에 좌절했던 첫 송고
'배치대기.'
세상에, 살면서 느낀 건 '대기'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씁쓸함이 따른다는 것이다. '발령 대기', '배차 대기'. 결국 다 기다리라는 말 아닌가. 도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뭘 더 고치라는 걸까. 차라리 한 줄이라도 이유를 알려주지. '배치대기' 네 글자가 유난히 서럽게 느껴졌다. 노선을 배정받지 못한 마을버스 기사라도 된 심정이었다.
이 허망한 마음을 시민기자 활동으로 '올해의 뉴스게릴라상'까지 받은 분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배치대기면 메인(톱 기사, 으뜸 이상)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에요!"
"대박!"
순식간에 카톡방에 축포가 터졌다. 훈련소 간 남자친구의 자대 배치를 기다리듯 오매불망 사흘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말대로 내 기사가 톱에 올랐다. '첫톱'이라는 이모티콘까지 훈장처럼 야무지게 붙어 있었다.
그 후로 스무 편의 기사를 더 썼다. 기사가 게재될 때마다 원고료가 차곡차곡 쌓였다. 30만 원이라는 고지를 넘더니 50만 원을 넘고, 어느새 오마이뉴스 원고료의 백마고지라 여겼던 100만 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배가 부르니, 쓸데없는 죄책감도 들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원고료를 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백마고지 위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원고료에서 10만 원을 떼어 '10만인클럽'에 가입했다.
▲오마이뉴스 원고료우와~ 백만 원이 넘었다 ⓒ 이인자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오마이뉴스 첫 송고 이후 지금까지 기사를 썼고 중간에 책도 출간했다. 쉬는 날이면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그야말로 '글복'(글쓰기 복)이 제대로 터진 시간이었다. 계축생 소띠.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다른 복은 몰라도 '글복'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가진 여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나를 계속 따라다닌 '글복'
첫 글복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터졌다. 88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아직 뜨겁던 시절, 올림픽 2주년 기념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참가해서 1등을 했다. 상금으로 빳빳한 수표 30만 원을 받았다. 금의환향한 집안 공기는 백일장만큼이나 열기가 뜨거웠다. 작은아버지 가족들과 고스톱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똥광에 목말라하던 엄마에게 똥광보다 비싼 수표 세 장을 안겨드렸다.
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작품이 전국대회에서 3위를 하며 50만 원을 더 받았다. 4시간 만에 쓴 산문 한 편이 상금 80만 원이라는 잭팟을 터트린 것이다. 엄마는 그 돈으로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 매장에 가서 가을 잠바를 사주셨다. 하필이면 황금빛 똥색이었다.
운이 튼 건지, 글이 튼 건지 모를 그날 이후, 나의 '글복'은 명절 선물세트의 굴비 꾸러미처럼 이어졌다. 대학 시절에는 시인이었던 교수님의 눈에 들어, 밤낮없이 시를 써 내려갔다. 사회에 나와서도 글은 늘 나를 먹여 살리는 밥줄이 되었다.
광고회사에서는 카피 한 줄을 위해 숱한 밤을 지새웠고, 홍보팀에서는 보도자료를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쏟아냈다. 때로는 카피 아르바이트로 쏠쏠한 용돈벌이까지 했으니, 내 인생은 끊이지 않은 글복 덕분에 먹고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 마흔여섯, '글복'이 뚝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회사에서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것이다. 노트북을 마주할 일도 사라졌다.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 시청은 스마트폰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이력서를 몇 장 냈지만 연락 온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나마 나이 제한이 없는 도서관 사서보조 공무직에 지원하게 되었다. 오십을 목전에 두고, 말과 글이 아닌 책과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손가락에 힘 빠질 때까지 계속 쓸 것
시간이 지나자 다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움틀거렸다. 글이 돈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맹물 같은 진심을 글로 담고 싶었다. '브런치스토리'라는 온라인 플랫폼에 매일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회사 일이 끝나고 집안일이 끝나면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스스로 끊긴 글복을 다시 꿰찬 것이다.
회사에 겸직 신청서를 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이 전부였지만, 혹시라도 원고료가 생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오십을 넘어서도 버리지 못했다. 예정 수입란에는 '소정의 원고료'라고 적었다. 이제 남은 건 글복을 제대로 터뜨리는 일뿐이었다.
그 후, 월간지 <에세이>에서 청탁이 들어왔고, 3개월 뒤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대신 3개월 안에 산문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완성해야 했다. 마음은 지치지 않았지만, 몸은 정직했다. 등은 더 굽었고, 뱃살은 늘었고, 눈은 침침해져 돋보기 도수를 높여야 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 송고 중글을 쓸 때마다 울퉁불퉁해지는 중년의 손 ⓒ 이인자관련사진보기
물론 내가 다시 꿰찬 글복은 늘, 묵묵히 지지하고 응원해 준 가족이 있기에 가능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 엄마한테도 보여줘."
내 기사의 1호 팬은 늘 엄마다.
"이번엔 어느 도서관으로 여행 가? 운전해 줄게. 밥은 당신이 쏴."
글의 여정에서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은 남편이다.
"엄마, 이번에도 내 얘기 또 쓴 거야? 얼굴은 절대 나오면 안 돼."
내 글에서 주인공이 되어주는 건 언제나 딸이다. 오마이뉴스 첫 톱 기사가 나온 다음 날, 여동생과 제부, 부모님을 모시고 집 근처 곰탕집으로 향했다. 첫 원고료가 적립 되었으니 기분 좋게 한턱 낼 생각이었다. 엄마에게 기사만 읽어보시라 했더니 댓글까지 다 읽으신 모양이다.
"너보고 늙은 엄마 고만 좀 부려먹으라는데?"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엄마 등골을 빼먹었으니, 평생 특곰탕이 아니라 특특곰탕으로 사드리며 조금씩 갚아나갈 생각이다.
지난달에는 도서관 관련 잡지에서 서면 인터뷰와 에세이 청탁이 들어왔다. 이번 달부터는 오마이뉴스 새로운 그룹 '요망진 중년'에 글을 쓴다. 조금 벅차더라도 오십 넘어 다시 찾아온 이 글복을 놓칠 생각은 없다. 기왕이면 돈복도 덩달아 오면 좋겠지만, 부모님께 특곰탕 한 그릇, 딸들에게 치킨 한 마리 사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일확천금은 필요 없다. 손에 쥔 글복 하나면 된다. 젊은 날의 글복은 돈과 갈채가 따랐지만, 오십의 글복은 돋보기를 쓰고서라도 기어이 써 내려가는 투지만 잃지 않으면 된다. 손가락에 힘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복은 어쩌면, 쥐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