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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l 05. 2024

나를 벌벌 떨게 한 벌의 벌

60대 남성, 등산하다 벌에 쏘여 숨져.

80대 여성, 밤 줍다 벌에 쏘여 사망

벌 쏘임 사고, 벌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6월부터 9월까지 발생

여름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벌에 대한 뉴스다.


드디어 벌의 계절이 왔다.

 

자의 반 타의 반 25년째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벌레는 우리에게 이웃이다. 결코 다정하지 않은. 벌레가 우리 집 경계를 넘어오면 문전박대를 하거나 대부분은 사망시킨다.


방구벌레! 방귀 뀌지 말고 나가줄래? 돈벌레!  돈 안 줄 거면 나가줄래?  집게벌레! 집게 잡고 나가줄래?

날파리! 이 날라리야 나가줄래? 모기! 넌 그냥 죽어줄래?  벌레에게 나는 다정하지 못해 살벌한 이웃이다.


어쨌거나, 벌레를 싫어하지만 무서워한 적은 없다. 그러니까 공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벌!

얘는 진짜 무섭다. 잘못 내쫓았다가는 사망까지 간다니 말이다.  벌이 그냥 조용히 비행만 해준다면, 내가 슬슬 피해 다니면 될 텐데 여름이면 집 어느 한 귀퉁이에 집을 짓고 산다. 대부분 처마 끝이나 잘 안 보이는 나뭇가지 사이에 집을 짓는다. 일명 은세권, 사람에게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은밀한 곳.


몇 해 전 6월 말이었다. 에어컨을 틀어야 할 시기인지라,  나름 아마추어가 할 수 있는 분리 청소를 완벽히 해내고 자신 있게 에어컨 리모컨을 켰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에어컨에서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틀면 틀수록 제법 많이 나왔다. AS서비스를 받아야 하나, 지금 불러도 한참 걸릴 텐데, 물에 젖어 원목마루 다 망가지겠네, 우왕좌왕.  실외기 쪽에 나가봐도 이상은 없다. 혹시 몰라 에어컨 배관호수를 들춰보는 순간,

세상에 이런 일이~ 벌이 에어컨 배관 호수 초입에 집을 지어놓은 것이다. 어찌나 야무지게 지었는지 호수 구멍에 벌집이 꽉 차서 물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역류했던 것이다. 다행히 벌은 외출 중이었다. 남편은 수건을 히잡처럼 두르고  완전 무장 상태로  에프킬러 1통을 분사하였다. 벌집 제거 완료... 툭툭 털어내자 벌집이 덩어리먼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벌의 은밀한 집터 잡기는 점점 진화되었다. 이듬해 에어컨 배수관보다 더 대담한 곳에 벌은 집을 지었다. 며칠 동안 현관문 근처에서 벌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분명히 왼쪽으로 날아가는 벌을 봤는데,  깜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어린이와 노약자가 사는 집이라  물리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공포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벌의 행적을 쫒았다.  현관문 왼쪽에 겹 유리 사이에 철제가 있는 공간이 있는데 실리콘이 5mm 정도 벗겨져 있었다. 벗겨진 그 틈을 타 유리와 유리 사이에 벌집을 지은 것이다. 적의 진지 안에 집을 지었으니 대담한 도발적인 이 행위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편도 집에 없고 아녀자의 힘으로는 제거 불가능이라, 119 소방대를 출동시켜야만 했다. 하필, 집채만 한 119 소방차가 출동했다. 그날따라 벌집제거 신고가 많이 들어와 차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손가락만 한 벌집 제거에 소방차까지 동원된 벌집제거소동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119 소방대원도 벌 잡을 때 에프킬러를 쓴다는 것을.


벌집 제거로 우리 집은 평화를 얻었지만 벌의 입장에서는 집을 잃었다. 벌집이 제거된 직후에 그 주위를 배회하는 벌의 허망한 공중비행을 여러 번 목격했다.


꿀 빨러 나갔다 온 사이, 집이 사라졌어요.

아버지는 사망, 삼촌은 행방불명

저 안에 꿀단지 있는데....

벌들의 세계에 심심치 않게 나올만한 뉴스들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곳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 벌들의 슬픔을 나는 알 수 없다. 벌이 위협적인 침만 가지지 않았어도 손가락 두세 마디만 한 벌집을 제거하기 위해 공권력까지 투입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나만의 위협적인 무기를 가졌다는 것은 나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때론 명을 재촉하는 아킬레스가 되기도 한다. 회사를 다닐 때 가끔 생각했다. 내가 20년이 넘도록 같은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성실함도 있겠지만 타인을 위협할만한 탁월한 능력과 무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무기를 가진 죄, 벌의 자업자득이라고 해두자.

나를 '벌벌 떨게 한 벌의 벌'이라고 해두자. 

잠시 아렸던 마음에 당위성을 부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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