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로또 번호가 숫자가 아니라 범주라는 걸 이야기했다. 그런데 범주형 자료는 로또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시야를 넓히면, 범주가 특수한 게 아니라 인간의 인지 자체가 범주적이다.
무지개를 보자. 빛의 파장은 연속 스펙트럼이다. 380나노미터에서 780나노미터까지 끊김 없이 이어진다. 자연에는 "빨강이 끝나고 주황이 시작되는" 경계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이 연속체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덩어리로 자른다.
왜? 무한한 연속 정보를 그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까. 뇌가 감당할 수 있는 단위로 묶어야 하니까. 이것이 범주화(categorization)다. 연속적인 세상을 이산적인 덩어리로 나누는 것.
그리고 이 나눔은 문화마다 다르다. 러시아어에는 밝은 파랑(голубой)과 어두운 파랑(синий)이 별도의 기본 색이다. 영어 화자에게는 둘 다 "blue"다. 같은 파장을 보고 있는데, 범주가 다르면 인식이 다르다.
범주화는 사치가 아니다. 생존 전략이다.
사바나에서 풀 뒤에 뭔가 움직인다. 이때 필요한 판단은 "저건 정확히 몇 킬로그램이고 어떤 종이며 현재 배고픈 상태인가?"가 아니다. "위험한가 아닌가?"다. 두 범주. 0.1초 안에 판단해야 한다. 연속적 분석을 할 시간이 없다.
이것이 인간 인지의 기본 구조가 된 이유다. 세상을 범주로 나누면 빠르게 판단할 수 있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으면 생존 확률이 올라간다. 정밀한 연속 분석은 안전할 때 하면 된다. 위협 앞에서는 범주가 이긴다.
나이를 보자. 나이는 연속 변수다. 그런데 인간은 "애기, 청소년, 청년, 중년, 노인"으로 자른다. 온도를 보자. 연속적인데 "춥다, 적당하다, 덥다"로 자른다. 사람을 보자. 무한히 다양한 개인인데 "우리 편, 남"으로 자른다.
언어 자체가 범주화다. "나무"라는 단어는 수십만 종의 식물을 하나의 범주로 압축한다. 모든 명사는 범주이고, 모든 형용사는 연속체를 범주로 자른 것이다.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범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범주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연결된다.
"커피"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무엇이 따라오는가. 음료, 카페인, 아침, 쓴맛, 향, 갈색, 카페, 대화, 집중. 이것들은 각각 다른 범주인데, "커피"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카페인"은 차, 에너지 드링크, 불면증과도 연결되어 있다. 범주들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 것이다.
이 그물이 세계관이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어떤 범주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민"이라는 사건 앞에서, "경제"라는 범주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 "노동력 공급"이 보이고, "안보"라는 범주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면 "위협"이 보인다. 사건은 같은데 범주가 다르면 세상이 다르다.
이 범주 네트워크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독서 취향이다. 특히 재미로 읽는 책.
공부를 위해 읽는 책은 의지로 선택한다. 범주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으니 낯선 분야도 펼쳐본다. 그런데 순수하게 재미로 읽는 책은 의지가 아니라 끌림으로 선택한다. 무의식적 선호가 작동한다. "이게 재밌다"는 느낌 자체가 기존 범주 네트워크가 공명하는 신호다.
그래서 재미로 읽는 책의 취향을 바꾸기가 어렵다. 입맛을 바꾸는 것과 같다. 입맛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선호 체계이고,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 책 재밌어"를 "이 책 재미없어"로 뒤집으려면 재미의 정의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건 세계관의 핵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세계관을 쌓기도 어렵지만 바꾸기는 더 어렵다. 확증 편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존 범주 네트워크와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그래서 하라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라리 비슷한 책을 계속 집어 들고, 도킨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도킨스 비슷한 책을 계속 집어 든다. 범주가 범주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범주의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익숙한 범주 네트워크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을 만났을 때. 로또 번호가 숫자인 줄 알았는데 범주라는 걸 깨달았을 때. 기보가 텍스트인 줄 알았는데 이미지라는 걸 깨달았을 때. 전통이라고 생각한 것이 단지 "전통"이라는 라벨을 아직 안 받은 현역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이 순간이 DRIP에서 말하는 R, 공명이다. "어?"라고 느끼는 순간. 기존 범주와 새로운 정보 사이의 간극을 감지하는 순간.
범주적 사고가 인간의 기본 운영 체제라면, "어?"는 그 운영 체제에 버그 리포트가 뜨는 순간이다. 기존 범주로 처리가 안 되니까 알람이 울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알람을 무시한다. 기존 범주에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예외"로 치부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이 알람을 무시하지 않고, 왜 기존 범주로 안 되는지를 추적하면 — 거기서 새로운 범주가 태어난다. 새로운 범주는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새로운 연결은 새로운 질문을 만든다.
인사이트가 범주의 재편에서 나온다는 것. 이것이 로또 번호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이유다.
다음 글에서는 이 범주적 사고를 창작에 적용한다. 범주를 무작위로 섞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로또의 random.sample()로 시(詩)를 짓는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