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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Nov 28. 2020

"올해 최우선 과제는 순산입니다."

스스로 세우는 성과목표

"저희 부서 올해 목표는 충분히 달성할 것 같습니다."


Christina Morillo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최근 부서장들과 팀원들이 모인 내년 사업계획 워크숍에서 우리 부서의 성과를 자신 있게 공개했다. 다들 아직 한 해가 끝나지 않았고 모두 성과 달성 및 평가로 인해 예민한 시기였다. 그런데 연중에 합류하여 아직 낯선 인물인 내가 그런 말을 해서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올해 중순 스타트업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국내 중견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정적인 조직의 규모와 비례하여 의사결정의 절차는 길어지고 실행 속도 역시 더뎌졌다. 그래도 각 분야에 오랜 경력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칼퇴를 만끽하며 근무하게 되었다. 비록 보수적인 제조업이다 보니 연차가 중요하고 스타트업 대비 조직구조가 아직은 예스러움이 많이 남아있지만 체질을 계속 바꾸려는 듯한 시도가 최근 꾸준히 엿보였다. 결국, 시대가 변하는데 기존의 일하는 방식으로는 새 시대의 마중물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한 듯한다.


입사 후 담당부서로 안내받고 팀원들과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팀원들은 나보다 연차도 높고 나이도 많았다. 나는 어르신들을 팀원으로 모시는 것은 익숙하였지만 이 분들은 나이가 어린 팀장이 부임하는 것에 대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그분들과 잠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다들 초면이니 꾹 참는 듯했다. 어색한 정적 속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 서로 파악하게 하느니 차라리 정식으로 나를 소개하는 게 모두의 정신건강에 이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에서 활용하고자 만들었던 내 커리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스티브 잡스


'원 모어 띵'만 생략했지 이미 스티브 잡스가 내 안에 빙의하여 각종 마케팅 관련한 기록과 증빙들을 담은 파워포인트 장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라는 사람을 팔았다. 최근 그 어떤 면접보다 더 성실하게 임했던 것 같다. 발표가 끝나자 팀원들은 자신들이 갑자기 면접관이 된 듯하다며 새로 부임한 상사가 파워포인트로 자신의 커리어를 설명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던 중 팀원 두 분의 배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곧 두 분이 올해 출산을 앞두고 있는 산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업무파악도 되지 않았고 팀원들의 이름과 얼굴이 매칭이 되지 않았지만 부서의 최우선 과제는 이제 내 머릿속에서 가을 하늘만큼이나 선명하고 뚜렷해졌다. 우리 부서의 핵심 성과지표는 바로 임신한 구성원들의 '순산'이라고 정했다. 나 또한 배우자가 출산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과 불편이 수반되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알았다. 그래서 직접적인 평가로 이어지는 과제들이 산적했지만 이분들이 순산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둘 순 없었다. 물론 누군가는 나의 지향점이 비효율적이고 회사의 목표 달성에 기여도가 적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이익보다는 구성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우선가치로 팀을 운영하고 싶은 게 내 욕심이자 목표였다. 고객, 임직원 그리고 주주 모두 중요하지만 결국 나에게 가장 우선순위는 내 옆의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Thirdman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래서 올해 부서의 목표가 뭐였는데요?"


워크숍에서 내가 이뤘다는 부서의 올해의 목표에 대해 다들 궁금해했다. 일말의 지체 없이 대답했다.



올해 최우선 과제는 구성원들의 순산입니다.



순간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다들 크게 웃었다. 나는 무척 진지한데 다들 재치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한 달 전 출산휴가에 들어간 팀원의 문자였다.


"이제 곧 출산하러 갑니다. 마무리하는 기간 동안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직하고 봬요!"


이제 올해 목표 달성의 구부능선을 넘은 듯하다. 물론 우리에겐 아직 또 한 명의 출산을 앞둔 구성원이 있다. 그분까지 순산을 하면 올해 우리 부서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모두 달성하게 될 것이다. 모두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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