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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Jan 04. 2021

신년 계획으로 유서 작성을

안녕 페트리샤, 안녕 지기

부고 소식


연말이 되자 엄마의 친구분들에게 전화를 해서 신년 인사를 드리던 중 한 분의 부고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코로나가 터지기 일 년 전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셨고 코로나가 터지자 방문 제한으로 찾아갈 수 없어 엄마는 늘 안타까워하셨다. 엄마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는 음식을 만들어 그분을 자주 찾아가셨고 '그때는 멀쩡했었는데 이놈의 코로나가 외로운 사람 잡았다'며 슬퍼하셨다.


그분의 부고 소식은 요양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알게 되었다. 코로나로 병원 방문이 제한되어 더욱 힘들어졌을 테고 그분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어도 며느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작년에도 서울 사는 막내아들만 가끔 얼굴을 보는 것 같았기에 분명 혼자 외롭게 죽음을 맞았을 거라고 추측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렇게 친구 한 분을 또 잃고 눈물 보이시는 엄마를 보니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으니 엄마 걱정으로 무거운 마음에 쓸쓸히 죽어간 나의 친구도 떠올라 마음이 아파왔다. 그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여전히 아프다.

 

이웃사촌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쯤 이 아파트로 이사 와서 일 년도 되지 않아 아들과 둘만 호주에 남게 되었다. 아들을 혼자 키우다 보니 혹시나 단출한 가족에서 오는 외로움을 아들이 느낄까 봐 우리는 아파트 이웃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아파트 이웃들과 친구가 되면서 아들에게 '이웃사촌'이라는 한국말이 있다는 설명을 해주며 멀리 있는 가족들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파트 이웃 15명과 친구 이상의 관계로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정성을 쏟으며 그렇게 19년 동안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2호실에 살며 아파트 전체를 관리하는 이탈리아 출신 아파트 매니저 샘과 호주 출신 아파트 매니저 모린 맥카이어 부부, 11호실에는 그리스 출신 피터와 프렌체스카 스텐베너스 노부부, 21호실에는 독일 출신 지기와 영국 출신 페트리샤  페비앙 노부부, 34호실에는 호주 출신 할머니 메이비스와 그녀의 평생 비서 호주 출신 할머니 메리, 37호실은 말레시아 출신으로 은퇴를 거의 앞둔 의사 카통 NG, 49 호실은 영국 출신 존스톤 부부, 54호실에는 매니저 동생 부부와 2명의 아이들 그리고 맨꼭대기 56호가 우리 집이다.


이들과 만나면서 친구가 되었고 가족이 되어주며 지냈다. 그렇게 19년 동안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서 어린아이들은 성장해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은 나이를 먹으며 병이 들기도, 병원 신세를 지기도, 실버타운으로 이사 가기도 했고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기도 했다.



지기와 페트리샤 페비앙 부부


엄마 친구분의 부고 소식에 떠오르는 이들은, 우리 아파트 21호실에 살았던 지기와 패트리샤 페비앙 노부부다. 칠십 대였던 두 사람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페트리샤는 파킨슨병에 치매 초기 증상이 진행 중이었고 그래서 지기는 페트리샤를 돌보며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다.


지기는 호주에서 40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유머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독일에는 유머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파티 자리에서 사람들이 웃고 즐기는 유머 중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에게 다시 물어왔다. 나는 지기에게 사람들이 왜 웃는지를 설명하려다 보면 유머는 사라지고 단어 뜻풀이 수준의 설명이 되었고 지기는 '사람들이 그 포인트에서 웃는구나'하는 정도만 이해하겠지만 여전히 웃기지 않는다 해서 나의 설명은 항상 실패로 끝났다. 그런 지기는 나의 말과 행동을 좋게 보셔서 아파트에서 의견을 모아야 할 때는 항상 나의 편이 되어 힘을 실어 주셨다.


페트리샤의 병이 점차 악화되어 어느 날부터는 혼자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추락사고들이 종종 생겨나자 우리의 작은 도움이 있어도 지기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차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집 방문 도우미를 일주일에 두 번 받으라고 권했고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는 페트리샤를 설득시켜서 정부 도움을 지기는 처음으로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두 번 중 하루는 도우미에게 할머니를 잠시 맡겨두고 나는 지기를 데리고 음식물 쇼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쯤 지기의 운전 실력도 안전해 보이지 않았고 차를 몰고 나가면 매번 사고를 냈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지기가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나는 지기를 데리고 나가 식료품 쇼핑을 같이 해줬다. 그럴 때면 지기의 차를 가지고 다녔고 그렇게 하는 것이 도움을 받는 지기의 마음이 덜 미안하다고 했다. 지기와 쇼핑하면서 나는 독일 제품의 통조림과 치즈와 햄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고 그들의 식사가 무엇인지를, 지기의 음식 솜씨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음식을 할 때 항상 넉넉히 만들어 우리가 먹을 만큼 2인분을 덜어내고 아들을 시켜 지기 집으로 자주 갖다 드렸다.




지기가 쓰러졌다.


5년 전 가을 어느 토요일 우리는 지기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12시 되기 전 이른 점심을 먹기에 나와 아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부엌에서 서성이며 각자 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Roase Lamb을 위해 오븐에 양다리와 야채를 넣고 굽기 시작했고 한 가지 더 해물을 많이 넣고 만드는 말레시아 음식 카레 락사도 만들었다. 디저트를 종종 담당하는 아들은 초콜릿 무스와 케이크를 이용한 디저트를 열심히 만들었다. 우리는 다 만든 음식들을 들고 강아지도 데리고 지기 집에 내려가서 카레 락사는 냉장고에 넣어 드리고 Roast Lamb으로 점심을 먹었다. 디저트까지 챙겨 먹으며 한나절 다 보낸 뒤에 집으로 올라오며 내일은 내려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지기 집을 가지 않았다.


월요일 늦은 모닝티를 하러 지기 집에 방문한 날도 평소와 같이 현관문 앞 복도에 지기의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당신이 집에 있다는 표시였기에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언제나 대답 소리와 함께 바로 문을 열어주던 지기는 그날따라 노크 소리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외출했나 싶어 집으로 그냥 올라가려다 혹시나 해서 매니저 오피스로 내려가 지기를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날 아침에는 신문도 사러 내려오지도 않았고 그때까지 지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매니저 오피스는 아파트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에 있어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아파트 사람들 대부분은 지나다니며 매니저들과 인사하거나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지기 할아버지는 하루에 몇 번씩 오피스를 찾는 단골 이야기 친구라 그날은 내려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매니저가 말을 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나는 다시 지기 집으로 올라가서 문을 두드리고 현관문에 바짝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지기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느꼈다. 서둘러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기 집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매니저가 비상 열쇠를 들고 와서 문을 열었으나 두꺼운 철문은 남자 손은 절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 열렸다. 문 틈 사이로 우리는 번갈아가며 지기와 페트리샤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이상한 소리는 전보다 크게 들려왔다. 우리는 안을 들여다볼 수없어 불안해했고 매니저는 오피스에 내려가서 엠블런스를 부르겠다고 했다. 나는 남아서 문을 계속 잡고 있다가 사진을 찍어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발로 문을 고정시키고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이용하며 문 틈으로 겨우겨우 손을 구겨 넣고 셔터를 마구 눌렀다. 그런 다음 어렵게 손을 빼내서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보니 현관문을 휠체어가 막고 있었고 휠체어 앞에 쓰러져있는 지기가 보였다. 그래서 현관문은 휠체어와 지기 몸에 막혀 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앰뷸런스뿐만 아니라 소방대원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세워두는 휠체어는 항상 브레이크를 잡아 놓기에 움직이지 않을 거고 거기에 지기가 몸으로 꽉 막고 있으니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희박해 보였다. 그래서 소방대원의 도움을 받아 발코니 창문 쪽으로 들어가는 시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기다리며 조금 열린 문을 잡고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했다. 조금 뒤에 페트리샤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서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페트리샤를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즉시 문틈으로 소리를 쳤다. "페트리샤 움직이지 말고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했다.


"지기? 지기?"를 부르는 페트리샤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의 위치는 거실 쪽 소파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페트리샤에게 곧 문을 열고 들어갈 테니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고 애원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페트리샤는 지기 이름을 날카롭게 부르며 흐느끼다 소리가 잠잠해졌다.


나는 다시 한번 문틈으로 손을 구겨 넣는 시도를 해서 사진을 찍어 확인했다. 거실 바닥 카펫 부분에 페트리샤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보이는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거실 바닥에 페트리샤가 쓰러져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매니저에게 바로 전화해서 엠블런스를 한대 더 불러 달라했다.


분명 페트리샤는 소파에 앉아 지기를 부르며 두리번거리다 지기 발을 발견하고 놀라 일어서려다 당신 거동이 불편하니 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페트리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방차 1대와 소방관 3명과 엠블런스 2대와 응급 구조사 4명


 우리 건물과 가까운 곳에 소방서가 있기에 부르자 소방차는 바로 왔고 소방대원 3명이 올라왔다. 소방 대원에게 내가 찍은 사진들을 모두 보여주었고 소방대원들도 쉽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응급 구조사들이 도착해서 지기와 페트리샤를 살피며 분주해 보였고 조금 멀찍이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 중 몇 명이 이동식 침대를 가지러 내려가자 나는 지기 옆에 다가갈 수 있었다. 옆에 앉아 지기를 조심스럽게 부르며 얼굴을 만져 보니 아주 싸늘해져 있었다.


그러자 지기가 눈을 뜨고 "페트리샤?"하고 한마디 불렀지만 나는 아내에 대한 걱정의 물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페트리샤 옆에 있을게. 약속할게"라는 말을 하자 스르르 눈을 다시 감았다.


나는 페트리샤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때 집안 곳곳을 살피던 소방 대원 한 명이 너의 이름이 이거지 하며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의아해 고개를 들어보니 그 소방대원이 지기 전화기가 있는 벽면에 커다란 글씨로 적혀있는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손짓하며 웃었다.


이동식 침대가 도착해서 지기와 페트리샤를 두대의 응급차에 각각 실으며 나도 함께 동행하기를 원했다. 지기를 실은 차는 먼저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달려 나갔고 나는 지기에게 한 약속대로 페트리샤를 태운 응급차에 함께 타고 병원으로 출발했고 매니저는 오피스 문을 닫으면 바로 병원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불길한 예감  


몇 년 전부터 나는 지기에게 의료 시설이 잘 되어 있어 24시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실버타운 같은 곳으로 가라고 적극 권했었다. 페트리샤는 혼자서는 거동이 거의 불가능해졌고 지기도 건강해 보였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불안한 생각이 가끔 들었다. 쇼핑 같이 다닐 때 가끔 심장과 위 주변이 뻐근하다고 해서 병원에 꼭 가서 진찰받고 검사도 받으라는 걱정 소리를 여러 번 했었다. 그렇게 몇 번 검사를 받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주치의가 늙으면 모든 기능이 떨어지는 거라고 가볍게 말을 했다고 해서 나는 주치의를 바꾸고 다른 일반의에게 가서 다시 진료받아 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실버타운 쪽으로 이사 가는 것을 자주 권유했었다. 지기는 실버타운을 몇 번 찾아가서 알아보며 이사 갈 생각을 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페트리샤의 반대로 포기하게 되었다. 페트리샤는 남편인 지기와 친한 우리 몇 명을 제외하고는 병이 심해지면서는 더더욱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지금 아파트에서 옮겨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렇게 몇 번 실버타운으로 옮겨갈 시도를 하던 중에 이런 일이 터진 것이었다.



응급실


응급실에 도착하니 의사와 간호사가 페트리샤를 데리고 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의사의 질문에 카펫에서 일어서려다 그대로 넘어진 것 같다는 대답을 하며 옆에 서 있으니 조금 후 병원 관련자가 찾아와 병원 환자 기록에 도움 달라며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나는 그곳에 가서 지기와 펫에 대한 질문에 답을 했다. 자식은 없고 유일한 혈육인 조카가 독일에 한 명 있고 유언으로 Power of Attorney (위임장)을 정부로 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병력, 담당 일반의 병원과 주치의 이름까지 말해 주었다. 그것이 병원 측에서 필요로 하는 그들에 대한 정보였고 병원 환자 기록 시스템에 모두 기록되었다. 그렇게 그들의 정보가 처리되자 병원 관련자는 나는 누구인지 물었다. 15년 동안 같은 아파트에서 친구로 지내왔다고 말하자 병원 측에서는 혈육인 조카나 정부 측에서 나서기 전까지는 환자를 발견하고 병원까지 데리고 왔으니 이후 나에게 모든 설명을 해도 되는지의 동의 여부를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동의했고 병원 환자 기록 시스템에 Next of Kin (법적, 공적, 친 인척) 칸에 나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록되어 나는 당분간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서류상의 일을 마치고 페트리샤에게로 돌아가니 페트리샤는 나를 보자 흐느끼기 시작했다.



페트리샤는 배고프다.

흐느끼며 불안해하는 페트리샤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울컥하며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녀의 상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울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이 모든 일들이 믿기지 않았고 감당하기 벅찬 감정에 힘이 들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어 그녀의 떨림인지, 나의 몸도 떨려와서 잠시 우리는 손을 잡고 같이 떨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울면 그녀의 불안이 더 커질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말을 건네며 그녀의 기억을 꺼내보려 했지만 페트리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포기하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나의 마음도 달래고 있으니 페트리샤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며 부끄러운 듯 수줍은 얼굴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많이 고프다고 나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수줍어하는 얼굴과 말투가 너무 귀여워 순간 나는 미소를 지었다. 곧 먹을걸 준비하겠다는 말을 하고 언제 마지막으로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니 솔직히 밥 먹은 기억이 나지 않아 자기도 믿기지 않는다고 답했다.


페트리샤의 말로 나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호주 병원에서 권장하는 하루 5끼를 아침식사, 모닝 차, 점심, 오후 차, 저녁식사로 5번 항상 나눠 드셨는데 그녀가 하나도 기억에 없다는 것은 이상했다. 보통 5끼 식사 중에 하나 정도는 기억하는 그녀였고 그녀의 치매 증상에는 식탐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한 번에 먹는 음식의 양도 많지 않았기에 나는 페트리샤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날 페트리샤의 옷차림도 평상복이었기에 지기가 쓰러진 것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6시 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기는 똑같은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아주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지기는 그날 아침 신문도 사러 가지 않았으니 최소 12시간에서 하루를 넘기는 시간 동안 그는 의식 불명 상태로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고 그러자 겁이 덜컥 났다. 간호사를 찾아가 나의 추측을 말하고 지기 담당의사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저런 추측으로 점점 더 불안해하고 있을 때 그 병원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온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아들에게 페트리샤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잠시 후 아들이 간호사와 함께 응급실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아들을 보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들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얼른 나를 안아주며 달래주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페트리샤가 다시 불안해 하자 아들은 사 온 음식을 페트리샤에게 들고 가 보여주며 나에게 시간을 벌어 주었다. 나는 잠시 떨어져 한번 터진 울음을 멈추려 애썼지만 그날은 그게 참 힘들었다. 그 후 매니저들도 모두 왔고 우리는 페트리샤 옆을 지키며 지기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다.


한참을 기다리니 지기를 담당하는 의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아들에게 페트리샤를 부탁하고 매니저들과 의사를 만나러 갔다.


의사는 지기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했다. 뇌출혈로 확인되었고 그때까지 의식을 전혀 차리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의식 불명 상태가 우리도 짐작하듯 오랜 시간 지속된 것으로 보아 다시 깨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을 하며 지기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준비하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참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 버렸다.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 울면서 의사에게 지기가 병원 오기 전에 잠시 한번 깼다는 것을 말해주며, 그래서 나는 지기가 다시 깨어날 거라고 믿는다 했다. 그런 나의 말을 듣고는 최선을 다 하겠지만 준비를 하라는 말을 남기고 의사는 걸어갔다.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솔직히 나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하루는 마치 악몽을 꾸는 듯 모든 게 무섭고 힘들었다.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먹먹한 심정에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기가 깨어난 것을 봤고 이야기도 했고 그래서 분명 지기는 다시 깨어날 거라고 믿는다며 친구들에게 횡설수설 말을 하며 계속 울먹였다. 친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야기하다 울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우리들은 서로 허둥댔다. 첫 번째로 떠오른 준비는 지기의 유일한 혈육이자 지기의 재산을 상속받을 조카에게 연락을 먼저 하는 것이었다.



페트리샤는 입원실로


페트리샤에게 돌아갔을 때 아들은 마법을 부린 듯 페트리샤는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응급실에서 입원실로 옮겨지는 페트리샤를 확인하고 우리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나설 수가 있었다. 그날은 하루가 무척 길었고 집으로 가는 길도 멀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병원 생활


그 후 한 달 넘게 Gold Coast Uni Hospital을 매일 아침 아들과 나는 함께 출근했다. 아들은 의대 수업이 마치면 바로 병실로 올라왔고 나는 아침부터 오후 5시 정도까지 병원에서 매일 지냈다. 병원 5층 지기가 있는 뇌출혈 집중 치료실과 3층 페트리샤가 있는 일반 병실을 번갈아 다녔고 오후 5시쯤 매니저가 병원을 오면 그때 교대해서 아들과 집으로 갔다. 호주에서는 보호자가 병원에서 잘 수는 없어도 병원 방문에는 별 제제가 없었다.



입원 하루 만에 페트리샤가 나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 냈다.


몇 년 전부터 페트리샤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때는 그녀의 병에서 오는 자연적인 기억 소멸인 것 같아 그냥 두었었다. 하지만 입원 첫날 페트리샤를 방문해서는 나의 이름을 기억시켜야 했다. 그녀는 어릴 적 영국 고아원에 잠시 있으면서 생긴 트라우마로 정부 기간 사람들과 간호사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첫날 그녀를 방문하니 그녀는 무서움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페트리샤를 위해 내 이름을 기억하라고 가르치며 병원에 있는 동안 간호사에게 다른 말도 필요 없이 내 이름만 말하면 나에게 바로 연락하도록 조처해 두겠다고 달래며 나의 이름을 꼭 외우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크게 A4용지에 몇 장 적어서 침대용 식탁 위에 올려두고  침대 옆 테이블에 그녀의 시선 닿는 방향 여러 곳에 세워 두며 하루 종일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부르도록 연습시키며 페트리샤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페트리샤가 처음으로 어제 일어나 모든 일과 지기의 상태를 알아들을 정도로 설명했다. 그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기를 위해서 무섭고 힘들겠지만 아내인 페트리샤 당신이 힘과 용기를 내야 한다고 이해시키며 입원 첫날은 그렇게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페트리샤 병실로 들어가자 그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 깜짝 놀랐다. 몇 년 동안 페트리샤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나의 이름이라 듣는 순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나의 이름을 불러 줄 만큼 페트리샤는 병실에 혼자 남은 두려움에 절실했을 거라는 짐작이 되었다. 비록 시선 가는 곳에 나의 이름들이 붙여져 있었지만 그래도 몇 년 만에 나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하는 페트리샤가 반가웠지만 한편 그녀의 심정을 너무 잘 알기에 울컥 울고 싶은 감정도 함께 올라왔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지기


지기는 뇌출혈 환자들만 따로 관리되는 집중 치료실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 진료시간 전에 지기 병실에 가서 있으면 의사가 와서 지기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의사는 기적적으로 지기가 깨어난다 해도 몸의 활동 기능을 장담할 수 없고 지금 상태에서는 지기의 오른쪽 몸은 신경이 많이 죽어 회복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만 확신해 주었다. 이때는 신체적 장애는 극복하면 된다 생각했고 제발 깨어나기만을 희망했다.


지기가 있는 집중 치료실에는 많은 의료기구와 모니터들이 놓여있어 바닥에는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펼쳐 있었다. 그리고 지기의 병실만을 전담하는 간호사가 24시간 배치되어 집중치료실에 배치되어 있는 모든 기계들을 수시로 체크하고 기록하며 시간 되면 주사약도 투입하는 등 지기를 24시간 케어했으며 들락날락하며 뭔가를 요구하는 의사들에게 지기의 상태와 기록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잠깐 보기에도 무척 바쁜 입원실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 가지 않는 쪽을 찾아가다 보니 지기의 발 쪽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비치된 의료용 장감을 끼고 지기의 발가락들을 하나씩 꼭꼭 눌러주며 지기를 담당하는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지기에게 페트리샤의 병원생활 이야기도 들려주며 항상 조잘대며 지기가 의식은 없어도 내 목소리와 이야기를 듣기 바랐다. 내가 지기를 방문한 시간은 오전, 오후 담당의사의 진료 시간에 맞춰 찾아가서 한 시간씩만 지기를 보고 그 외 시간은 페트리샤와 보냈다.



이게 행운이라고?


사흘 만에 지기가 깨어나자 지기 병실에서 친해진 간호사가 바로 연락을 해왔다. 나는 뛰 듯이 걸으며 지기를 보러 갔다. 지기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발음도 크게 어눌하지 않아 알아듣기에 충분했다. 지기가 궁금할 것 같아 제일 먼저 페트리샤는 잘 지낸다는 말을 해주고 있으니 의사가 찾아와 지기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지기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고 의사가 나가자 지기가 혼자 중얼거렸다. "몸 반쪽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게 행운이고 기적이냐, 차라리 죽는 것이 행운이지 않겠냐"라는 자조적인 말을 했다. 그 말에 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기를 보고 지내온 15년 동안 나는 지기의 성격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몇 번의 친구들의 건강 문제를 보게 되면서 이런 이야기를 서로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지기는 분명하게 불구로써 사는 삶을 자신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나는 지기의 병실을 나오며 지기가 깨어났다는 기쁨은 사라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파트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서 지기가 깨어난 것을 알렸고 지기가 중얼거린 말도 전해 주었다. 이제부터 지기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함을 깨닫고 내가 한 행동들에 대해 처음으로 반성하며 우울했다.


Power of Attorney(위임장)


깨어난 다음날로 지기는 집중 치료실에서 뇌출혈 병동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병원 측에서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은 정부 측 사회복지 담당자가 일반 병실로 그날 찾아와서 나를 찾았다. 이제부터는 정부 측 관리하에 지기와 페트리샤는 지내게 될 거라고 했다.


호주 사람들은 위임장을 상대 배우자나 그러지 못할 경우엔 자식들에게 대부분 주고 있다. 정부에게 위임장을 줄 경우 적지 않은 불만들이 있다는 것을 지인들에게 들어 알았기에 지기가 이런 결정을 하려고 했을 때 나는 지기에게 몇 번 매니저에게 부탁해보라고 권했었다. 그러면 나도 매니저 옆에서 최대한 도울 수 있지 않겠냐고 말도 했지만 지기는 단호했다. 그때 지기가 나에게 해 준 말은 "자신도 싫은 일을, 이런 똥 치우는 일을 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특히 너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겠냐 지금으로도 너무 충분하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면 넌 반드시 거절해야 한다. 너는 No를 아끼지 마라" 고 나를 크게 나무랐던 기억이 났다.


이제부터 정부가 다 알아서 그들의 병원과 차후 지낼 곳을 정해 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친구로서의 도리만 다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파트 친구들은 정부 위임장 시스템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며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너무 피곤해서 이야기에 낄 힘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지기와 펫이 결정한 사실에 대해 뭐라고 이제 와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며 받아들였다.



병원과 양로원 중간과정으로, 양로원이 정해지기 전까지, 재활치료를 받으며 잠시 머무는 재활치료 센터

 병원 입원 한 달 만에 페트리샤가 먼저 재활 치료 센터로 옮겨졌고 지기는 2주 후에 그녀가 있는 재활 치료 센터로 이송되었다. 정부에게 맡기면 이때부터 부부라도 다른 곳으로 배정받아 영여 떨어져 지낼 수가 있다고 했다. 이런 것이 정부에게 위임장을 주면 나타는 큰 문제점 중에 하나였다. 부부지만 생이별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기와 페트리샤는 다행히 같은 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나의 건강에 빨간불이 다시 켜졌다.


나와 셋째 언니는 서로 아이들을 데리고 만나자는 약속을 했고 호주도, 미국도 아닌 엄마가 계시는 한국으로 장소를 정해서 우리는 이야기를 하며 바로 항공권을 구입했다. 그런데 몇 달 후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행을 취소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기와 페트리샤가 쓰러지고 병원을 매일같이 다니자 나의 건강에 적신호가 다시 켜졌다. 그러자 아파트 매니저들은 물론이고 나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계획대로 한국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그들은 이미 장기전에 들어섰고 이러다가는 그들보다 내가 먼저 죽는다며 그들은 하나같이 걱정 소리를 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병원 신세를 지며 관리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지기가 쓰러지고 그들을 돌보려 매일같이 병원을 쫓아다니다 보니 나의 건강에 다시 빨간불이 수시로 켜졌다. 그들이 쓰러진 후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나의 성격을 잘 아는 아들도 여기 환경에서 잠시 나를 떼어놓기 위해 한국으로 여행 가기를 권했다.




지기의 심리 변화


재활치료 센터를 매일 아침에 찾아가서 페트리샤를 데리고 지기 병실로 함께 지내다 오후 2시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먹고 싶어 하는 점심을 사들고 페트리샤를 데리러 가니 그녀의 안색이 평소와 너무 달랐다. 간호사를 찾아가 물었더니 그날 아침 페트리샤를 지기 방에 데려다줬는데 둘이 크게 다툰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노인네들이 무슨 일로 다퉜을까 궁금해하며 페트리샤에게 갔다.


점심 먹으러 가자고 페트리샤를 휠체어에 태우자 그녀가 나에게 말을 "지기가 나를 보는 게 반갑지 않은 것 같아" 했다. 나는 그 말에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페트리샤를 달래고 지기 병실로 갔다. 지기가 나를 보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때 페트리샤가 "지기 이제는 내가 반갑지 않나요?"라고 두 번 똑같은 말로 질문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놀라 페트리샤와 지기를 번갈아 보았지만 지기는 페트리샤 말을 듣지 못했는지 대답을 하지도 않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 지기의 행동을 처음 보는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만 나는 그날 그들이 먹고 싶어 하던  Fish n Chip(생선 튀김요리)를 사 갔기에 어색한 분위기를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음식을 펼쳐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며 여기까지 음식이 식을까 싶어서 열심히 과속해서 왔다고 분명 과속 티켓이 집으로 몇 장 날아올 것 같다고 엄살을 피우자 그들이 웃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그들의 점심 식사를 도왔다. 그러고는 그들의 분위기도 다시 괜찮아졌고 지기도 페트리샤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파트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혹시 지기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낀 사람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지기가 이상해졌다고 말해주었다. 특히 매니저는 지기가 장애인이 된 사실에 화를 많이 내며 이상한 행동을 자신 앞에서 했다고 그제야 나에게 털어놨다. 내가 본 지기는 친절했고 반가워하고 언제 오냐고 물으며 나를 기다리는 모습도 보여주었기에 나는 지기의 심리적 변화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지기도 나도 그의 장애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저 그의 움직임에, 행동의 불편함이 있을 때만 나는 조금 도와주었을 뿐이었고 그냥 처음에도 그랬던 것처럼 특별해하지도 않았고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병원 측에 지기의 심리 상태를 주변 친구들 이야기까지 해주며 심리 상담 치료를 더 많이 병행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렇게 지기는 심리 상담사들과 자주 상담을 받았고 차츰 나아지는 듯 보였다.



한국행을 결심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지기에게 "한국 갈 때가 다 되어가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가야 할지 조금 망설여진다"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니 지기는 자기들 걱정하지 말고 찰리 데리고 한국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라고 했다. 지기는 우리가 6월쯤에 간다는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었고 나의 건강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어오며 걱정해주셨다. 지기의 기억력은 이번 뇌출혈로 인한 손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부고 소식

우리는 계획대로 한국에 나갔고 2주쯤 지내고 있을 때 호주 매니저로부터 페트리샤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온몸이 싸늘해지며 무거운 돌덩이가 심장을 찍는 듯 아파왔다. 울음이 터져 나왔고 가슴은 아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파트 매니저가 소식을 받았을 때는 이미 지기의 독일 친구와 정부 측 복지사가 페트리샤의 죽음, 화장까지 다 마친 마친 후에 그냥 통보였다고 했다. 연락받고 즉시 재활치료센터로 가서 조의를 표하며 지기를 만났지만 별말 없었고 그의 옆 깡통에 들어있는 페트리샤는 차마 쳐다볼 수 없어 서둘러 지기 병실을 나오던 길에 페트리샤를 담당했던 간호사를 만나서 페트리샤가 보낸 마지막 며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페트리샤를 휠체어에 태우고 지기를 방문했고 그날 지기가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 나는 영원히 혼자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너를 돌봐 줄 수도 없다. 우리는 이제 틀린 것 같다"라는 말을 진지하게 했고 그 말을 듣고 있던 페트리샤가 점차 크게 흐느껴 울어 그날은 서둘러 페트리샤를 그녀의 병실로 옮겨 주었다 했다. 그런 후 페트리샤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며 누워있었고 이틀 만에 너무 쉽게 죽음을 맞았다 했다.


그리고 매니저는 차마 깡통에 들어있는 페트리샤에게 작별을 고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를 일찍 잃은 매니저는 독일 사람 지기보다는 영국식 유머를 알아듣고 웃어주는 영국 할머니 페트리샤를 더 좋아했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았다. 매니저는 통화 끝으로 지기를 더 이상 찾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해 왔다. 거기에 '내가 돌아갈 때까지 너도 시간을 가져'라는 말을 겨우겨우 하며 통화를 마쳤다.


페트리샤는 남편 바라기였었다. 파킨슨병으로 몸 전체를 장애가 된 지기보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어도, 치매로 모든 기억이 흐려지고 잃어버려도 남편과 함께여서 늘 행복해하며 여유로웠다. 그렇게 착하고, 남편 바라기였던 할머니가 곡기를 끊은 이유는 분명 남편 지기에게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 먼저 끈을 놔버린 것이라 짐작되었다.


나의 죄책감

우리는 한국을 나오지 말고 호주에 있었어야 했다. 나라도 그녀 곁에 있으면서 지기를 설득시키고, 페트리샤를 이해시키며 달래주었더라면 페트리샤가 스스로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으로 한동안 오래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이 부분에선 여전히 죄책감이 남아 있다.



지기의 죽음


한 달간 한국 여행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오니 아파트 매니저와 친구들은 더 이상 지기를  방문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기를 다시 방문하기 시작했다. 다시 방문한 첫날 지기는 내가 없는 동안 더 많이 독일 사람이 된 듯 건조한 말로 아내 페트리샤 죽음을 아주 담담하게 차라리 잘 됐다는 식으로 나에게도 말을 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힘들어 보이지 않아 다행스러웠지만 그런 그의 말이, 행동이 이상했지만 몹시 슬퍼 보였다.


그다음 날부터 지기를 방문하니 그전과 같았다. 지기 병실을 들어서면 항상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는 페트리샤 이야기는 꼭꼭 넣어두고 평소처럼 모든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2달이 지난 뒤 지기의 양로원이 정해졌고 지기의 요청대로 친구 집 근처 요양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와는 3시간 거리로 멀어지게 됐지만 지기가 원하는 곳이기에 좋았다. 나와 아들은 전처럼 지기를 자주 찾아갈 수는 없었으나 한 달에 두 번 정해놓고 그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을 더 사시고 어느 평일날 지기 할아버지가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했다. 평소에 지기의 당부가 있었다며 지기의 독일 친구가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지기는 우리가 먼 길 찾아와서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고 집으로 먼길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자신이 죽으면 바로 부르지도 말고 처리 다 한 후에 우리에게 알려 주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기는 친구를 만나면 우리 이야기를 자주 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지기와 페트리샤에게 찾아온 마지막 행운이며 기적은 15년 전 우리와의 만남이었으며 그렇게 이어온 인연이었다고 했다 한다. 나와 아들 찰리가 살아가는 모습, 이뤄내는 것들을 함께 지켜보며 기뻤고 행복했다고 그리고 항상 너무 고마워했다고 했다 한다.



두 분 모두에게 Rest In Peace를


20살 지기와 22살 페트리샤는 영국에서 만나 사귀다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교제하던 중 어느 날 지기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병문안을 가려던 페트리샤는 뭘 사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담배 피우는 지기가 생각나 담배 한 보루를 사들고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그때까지 페트리샤는 지기의 병명을 몰랐고 지기가 누워있는 병실에 가서 '빨리 났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담배 한 보루를 선물로 내밀었더니 병실에서 지기가, 그 옆 환자까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고 그들이 웃는 이유와 지기의 호흡기에 관한 병명을 듣고는 그녀는 몹시 당황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지기는 페트리샤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국에서 결혼 서약을 하고 나오면서 찍은 지기와 펫의 결혼식 사진. 옷에 맞는 모자는 페트리샤가 직접 만드었다고 한다.



이 둘은, 부부로 살아온 인생이 64년이었다. 15년 동안 내가 보아온 그들의 모습은 사랑과 친숙한 배려였다. 아픈 페트리샤를 보살피는 지기와 돌봄을 받는 페트리샤의 얼굴은 항상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지기가 장애를 인정하며 극복했다면 본인도 아내 페트리샤도 각자 따로 도움을 받으면서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이웃사촌으로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해 봤다.


페트리샤의 죽음은 죄책감이 드는 미안함과 죄송함이었지만 지기의 죽음은 슬펐지만 지기의 마음을 알 수 있어 고마웠고 그리웠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할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우리에게는 한결같이 친절하고 좋았던 지기 할아버지였다.


나는 하늘 위 어느 곳에서 서로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지금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을 떠나보내고 한동안 나는 다시 돌려보는 비디오처럼 그들과 나누고 들었던 모든 말과 행동들을 자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인가부터 지기가 보였던 페트리샤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처음에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계속 생각해보면서 차츰 지기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고 책임져온 지기의 성격으로는 장애를 받아만 들였다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었을 테지만 페트리샤는 달랐었다. 지기가 옆에 없는 삶은 공포였다. 병원과 재활치료 센터의 모든 병원 관련자들이 페트리샤에게는 공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기가 깨어난 후에도 매일 병원으로, 재활치료센터로 다닌 이유는 페트리샤에 대한 걱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둘을 같은 병실에 둘 수 있는지 병원과 센터에 요청했었지만 1인 1실 원칙을 깰 수는 없었다. 페트리샤가 어릴 적에 생긴 공포심은 파킨슨 병과 치매로 점점 더 악화되었고 그런 모든 걸 생각하며 지기의 말들을 떠올리니 차츰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이런 일을 겪으며 나는 아들과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했다. 나와 아들은 죽음을 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끝맺음이라 것에 서로 동의했다. 그래서 끝맺음을 잘하기 위해 나와 아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며 서로의 죽음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죽음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아들과 나는 서로에게 유일한 혈육이자 서로의 위임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년 계획으로 유서를 쓴다.

나는 올해부터 신년 계획으로 유서를 쓴다. 유서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죽은 후에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의 생각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내가 죽으면 슬프겠지만 너의 밝고 환한 얼굴과 미소를 무엇보다 사랑했던 엄마이니 너무 오래 슬픔에 빠져 있지 말고, 너무 많이 울면 달래 줄 수 없어 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으니 너무 많이 울지도 말고, 내가 소유한 것들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너와 함께한 시간들이니 기억하고 추억하며 너는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나의 여름용 홈드레스 입고 있는 페트리샤, 무척 마음에 든다 해서 흐뭇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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