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1월 5일 월요일 -
■ https://youtu.be/HUZbq6JZ8ro?si=-Bjcdy_GWT4GMdwn
2026년 새해가 밝았다. 이미 1월의 첫주가 지나버렸지만 1월의 첫날이 목요일이었던 탓에 실질적으로는 월요일인 오늘부터 2026년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새해 일출을 보며 다짐했던, 하루에 꼭 한 편의 글은 쓰겠다는 새해의 각오가 4일차에 벌써 꺾여버렸다. 지금은 자정... 문장을 다듬고 정리하느라 자정을 넘겨버렸다. 매주 주말 어머니가 계신 태백을 다녀오다보니 일요일 밤 이 시간은 늘 졸음과의 싸움이다. 비록 피곤한 몸일지라도 새로운 한 주의 계획을 짜면서 듣게되는 음악은 그래도 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지난해 브런치북으로 연재를 시작했던 <나의 클래식 음악일기>는 모두 3권을 끝으로 연재를 마쳤다.
지난해 10월 초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낙상사고를 당하시면서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며 병구완하느라 도무지 매일 아침 시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클래식 음악일기>는 매일 아침 눈뜨면 창문을 열고 온 몸으로 느끼는 날씨와 분위기, 그리고 세상돌아가는 소식을 바탕으로 음악을 선곡하고 그 선곡의 이유가 되는 작품의 특징과 작곡가의 삶을 중심으로 쓰여진 글이다. 브런치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공감과 감동을 나누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없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부산시향 연주회에서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기의 울림에 충격을 받은 이후로 또래들이 팝송을 들을 때 난 <가정 음악실>, <클래식 살롱>같은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며 클래식 음악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운좋게 방송국에 입사해서는 KBS 클래식FM의 <가정 음악실>(부산권역)을 1년 넘게 연출하기도 했었고, 과문하지만 방송국에서 나만큼 클래식 음악 마니아가 없다보니 KBS교향악단 연주 녹화는 늘 내 몫이었다. 물론 공연 프로그램 연출보다는 시사교양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연출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쌓아왔지만, 3개월 넘게 매일 아침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다 그 시절에 쌓인 내공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3년 넘게 매일 아침 쓰던 글을 멈추고 나자(브런치는 지난해 6월에 시작했지만, 나의 클래식 음악일기는 2022년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시작되었었다.) 갑자기 삶이 너무 건조해졌다. 밤이 되면 그냥 하루의 그 많던 시간들이 가루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과 태백을 전전하는 동안에도 자동차 스피커와 귀의 이어폰에는 음악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음악들은 내 감정과 어떤 교감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건조한 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리고 있었다. 삶이란게 이렇게 윤기없이 메마른 모양이어도 괜찮을 걸까?
결국 새해부터 매주 1편이라도 내 삶 속에 음악의 빛을 담아 윤을 내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 쓰는 글은 그날 그날의 날씨와 세상소식, 그리고 산책길에 마주하게 된 세상의 아름다운 존재들이 소재가 되어주었는데, 이제 1주일 한 번 글을 쓴다면 무얼 가지고 써야할까?
일단 오늘부터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나의 클래식 음악 캘린더>는 매주 일요일 밤, 한 주를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는 한 주의 계획을 세우며 쓰게 될 것인데... 내 삶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이야기들은 역시 사람이 가장 좋을 지 싶다. 이 주에 태어난 음악가 또는 이 달에 태어난 음악가들과 그의 작품들 중 내가 애정하는 작품들을 가지고 정리하다보면, 이건 또 아카이브의 의미도 있겠다 싶다.
먼저 1월에 태어난 음악가들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1) 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Giovanni Battista Pergolesi) :
1710년 1월 4일 생(이탈리아)으로 26세에 요절한 천재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어머니 마리아가 겪는 고통을 묘사한 가톨릭 교회의 성모 찬가곡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로 유명하며, 클래식 음악 사조가 바로크에서 고전파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했던 작곡가다.
(2) 무치오 클레멘티 (Muzio Clementi) :
1752년 1월 23일 생(이탈리아)으로 '피아노의 아버지'라 불린 이다. 피아노 소나티네 앨범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하며, 그의 생전에는 모차르트와 피아노 경합을 벌이기도 한 인물이다.
(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
1756년 1월 27일 생(오스트리아). 1월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 설명이 필요 없는 고전주의 음악의 정점.
(1)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년 1월 31일 생(오스트리아).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모차르트와 생일이 겨우 4일 차이다. 겨울에 태어나서였을까 슈베르트의 곡들은《겨울 나그네》처럼 쓸쓸하고 처연한 아름다움이 배여있다.
(2) 밀리 발라키레프 (Mily Balakirev)
1837년 1월 2일 생(러시아). 우리에겐 러시아 5인조의 리더로 잘(?!) 알려져 있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기틀을 닦은 작곡가다. 예전에 소객한 적 있지만, 피아노의 최고 난곡 중 하나인《이슬라메이》가 유명하다.
(3) 막스 브루흐 (Max Bruch)
1838년 1월 6일 생(독일)으로 연도는 늦어도 생일은 빠른 편이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낭만주의 협주곡 중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첼로곡 《콜 니드라이》도 유명하다.
(4) 에마뉘엘 샤브리에 (Emmanuel Chabrier)
1841년 1월 18일 생(프랑스). 우리에겐 조금 낯선 이름이지만, 예전에 드뷔시와 라벨 등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의 관현악곡 《에스파냐(스페인)》이 특히 유명하다.
(5) 에르네스트 쇼송 (Ernest Chausson)
1855년 1월 20일 생(프랑스). 그는 세자르 프랑크와 쥘 마스네의 제자로, 바이올린 곡 《시(Poème)》가 대표작이다. 이 곡은 섬세하고 우수 어린 선율이 특징이다.
(1)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 (Alexander Scriabin)
1872년 1월 6일 생(러시아). 우리에겐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마 음악원 동기이자 라이벌로 잘 알려져 있는 스크리아빈. 초기에는 쇼팽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신비 화음'이라는 독자적인 무조 음악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래서 그의 초기 음악은 익숙한데, 중기 이후의 음악은 일반인들이 감상하기에는 좀 부담스럽긴 하다.
(2) 프랑시스 풀랑크 (Francis Poulenc)
1899년 1월 7일 생.(프랑스) 1920년대 프랑스 음악계를 혁신한 6인조(Les Six)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신선하고 간결한 음악언어를 보여주었다. 특히 성악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146곡의 가곡과 《스타바트 마테르》(1950) 같은 종교 합창곡에서 아한 프랑스풍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1월에는 모차르트(27일)와 슈베르트(31일)라는 두 거장의 작품들만 소개해도 한달 선곡과 글이 다 나오겠지만, 이번 브런치 북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작곡가보다는 좀 낯설지만 들으면 너무나 감동적인 작품을 우선해서 선곡해보려고 한다.
이런 기획의도에 제일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앞서 들어본 가톨릭 교회의 성모 찬가곡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의 지오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4~1735.3.16)
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 5인조의 리더였던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의 출생일이 1월 2일, 1월 달력 가장 앞자리에 있지만, 이전 브런치에서 발라키레프는 몇 번 소개한 적이 있기도 해서...
발라키레프의 음악이 삶을 향해 솟구치는 강한 의지라면, 페르골레시의 음악, 특히 그가 죽기 직전 남긴 곡들은 삶의 유한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투명한 슬픔이 오늘 밤 더 내 맘을 빛나게 해준다.
서른도 채 되지 못한 2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젊은 작곡가의 마지막 기도가 이 브런치 연재의 첫번째 제목이 된 이유는 이 연재가 단순한 음악사적 나열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유한한 인간의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예술혼이 담긴 작품들... 새로운 한 주를 버텨낼 수 있는 힘은 그 속에 있지 않을까?
이탈리아 예시(Jesi)에서 태어나, 나폴리 악파의 전통 속에서 단 26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작곡가이다. 그는 나폴리의 콘세르바토리오에서 프란체스코 두란테, 레오나르도 빈치* 등에게 수학하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 17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성씨가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름 뒤에 출신 지역을 붙여 구분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Vinci)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da Vinci'(빈치 출신)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서양 미술사나 학술 서적에서는 이런 이유로 '다 빈치'보다 '레오나르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정확한 호칭으로 여겨진다. 반면 페르골레시의 스승이었던 레오나르도 빈치(Leonardo Vinci, 1690-1730)는 실제 'Vinci'가 그의 성이다. 그는 나폴리 악파의 중요한 바로크 작곡가로,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약 200년의 시대 차이가 있으며 완전히 다른 인물이며, 'Vinci'가 그냥 성씨이기 때문에 'da'를 붙이지 않고 '레오나르도 빈치'로 표기하였다.)
페르골레시는 1732년경 나폴리의 유력 귀족 가문에서 궁정 악장으로 활동하며 여러 미사곡과 오페라를 발표하게되는데, 이때부터 이미 나폴리 음악계에서 촉망받는 젊은 인물로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그는 오페라와 종교음악 두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했는데, 특히 희극 오페라 《사랑에 빠진 수사(Lo frate 'nnammorato)》와 같은 작품에서는 나폴리 방언을 활용한 생동감 있는 대사로 희극적 감각을 잘 표현했고, 미사곡과 종교적 작품에서는 섬세한 선율과 경건한 정서를 잘 결합해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1733년에 그는 정극 오페라 《교만한 죄수(Il prigionier superbo)》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의 막간극으로 삽입된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가 인기를 끌면서 훗날 그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본편 오페라는 거의 잊힌 반면, 이 짧은 막간극은 각국 무대에서 독립된 오페라 부파로 널리 상연되며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페르골레시는 이렇게 진지한 오페라와 가벼운 희극 사이를 오가며, 장르적 경계와 상관없이 ‘노래하는 선율’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작곡가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 전도유망한 천재 작곡가는 안타깝게도 병약한 체질때문에 건강이 늘 좋지 못했다. 특히 폐질환으로 늘 고통받았는데,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세가 악화되면서 그는 점점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거나 지휘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져들었다. 1736년 결국 그는 나폴리 인근 포추올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으로 옮겨 요양하게 되는데, 이곳이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되었다. 스물여섯 청년의 생애는 이렇게 수도원 병실과 함께 끝을 향해 서서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이 무렵 페르골레시는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슬픔의 성모)》라는 새로운 곡을 의뢰받게 된다.
당시 이 작품은 의뢰한 곳은 나폴리의 세속 귀족 단체인 '슬픔의 성모 기사단'(Cavalieri della Vergine dei Dolori)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몇 년 전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에게도 같은 텍스트에 곡을 의뢰한 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기존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버전을 대신할 새로운 《스타바트 마테르》를 원했고, 죽음에 가까워진 젊은 작곡가 페르골레시는 이미 결핵으로 몸이 망가져 있었고, 수도원 병실에서 일상적인 삶조차 힘겹게 견디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뢰를 받아들인다.
페르골레시는 이미 자신의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성모의 절규와, 하루하루 쇠약해져 가는 작곡가 자신의 육체적 고통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을 것이다. 성모의 비애는 곧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감각이자,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한 인간의 내면적 독백으로 겹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의 는 수많은 같은 제목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유독 ‘인간적인 울림’과 ‘절제된 비애’로 기억된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친구가 병문안을 왔을 때 페르골레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침대에 누운 채 악보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가 자신의 남은 생을 걸고 완성하려 한 영적·예술적 유언에 가까웠음을 암시한다. 1736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몇 주 동안 이 작품은 병상에서 마무리되었다. 스물여섯 청년의 뜨거운 신심과 예술혼이 마지막 숨결까지 불꽃처럼 타오르며, 그 에너지가 한 장 한 장 악보에 새겨진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음악은 과장된 비극이나 장엄한 드라마 대신, 조용하게 흐르는 눈물에 가까운 정서를 택한다. 소프라노와 알토 두 성악 솔로, 그리고 현악기와 통주저음이라는 소박한 편성은 웅장한 대성당에서 터져 나오는 집단적 장례의 비탄이 아니라, 작은 침실 한켠에서 신에게 나직이 말을 거는 개인의 기도처럼 들리도록 만든 것이다. 이 절제된 규모감은 오히려 청자의 귀를 더 가까이 붙들어, 한 사람의 슬픔과 숨소리를 또렷하게 느끼게 해준다.
첫 악장 ‘Stabat mater dolorosa’에서 두 성부가 교차하며 떨어지는 선율은 마치 눈물방울이 툭, 하고 흘러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화성은 복잡한 대위법이나 화려한 장식 대신 비교적 단순한 진행을 택하지만, 곳곳에 스치는 불협과 긴장은 과장되지 않은 상처의 통증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 음악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오히려 숨죽여 울며 버티는 슬픔을 그려낸다. 그래서 더 오래, 더 깊이 남는 것이다.
음악사적으로 보자면,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바흐와 헨델로 대표되는 후기 바로크의 장식적·대위법적 양식보다는, 훗날 모차르트로 이어질 고전주의의 명료한 선율과 투명한 구조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복잡한 폴리포니 대신 선율선과 화성의 간결한 대비가 강조되고, 감정의 표현도 장식적인 수사를 줄인 대신 선율 그 자체의 호흡으로 전달된다. 이 때문에 작품은 특정 시대의 양식을 넘어, 시대를 모르는 인간적 슬픔의 언어로 들리곤 한다.
이 작품은 페르골레시가 세상을 떠난 뒤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가며, 그의 이름을 사후에 오히려 더 크게 만든 작품이 되었다. 한때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이 《스타바트 마테르》는 가장 자주 연주되고 출판되는 종교음악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비평가와 사상가들 역시 이 작품의 순수한 선율성과 절제된 정서를 높이 평가하며, ‘젊은 천재의 마지막 고백’이라며 작품의 의미를 해석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연주와 녹음이 이 작품을 다루지만, 좋은 연주는 세련된 해석과 종교적 경건함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을 찾는다. 과도한 감정 과잉이나 과장된 극적 효과는 오히려 작품의 본질을 가린다. 담백한 성악과 투명한 음색, 그리고 절제된 다이내믹이 어우러질 때, 페르골레시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맑은 슬픔과 내밀한 기도가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