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마단조 Op.64, 2악장 중 '호른의 노래'

by 최용수

https://youtu.be/ELaPtPsLmDI?si=qjI_WDvuiwtl4m96

지휘 : karajan / 연주 : berliner philharmoniker


힘들더라도 기어이 도달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한달 가까이 이 길이 나의 길인가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때로 인생은 패배가 예정된 전장(戰場)일지라도

용기를 내 오래된 무구(武具)를 꺼내 길을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삶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예정된 날은 아니지만, 문득 이 음악이 듣고 싶어서 브런치북을 열었다.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첫번째 브런치북의 첫번째 음악이었다.

그때 브런치 글에서 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운명과의 투쟁'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1악장의 음울한 행진과 4악장의 승리를 자축하는 팡파르에 주목했었지만,

오늘은 그 고독한 투쟁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돌아보는 2악장이 듣고 싶었다.


Andante cantabile, con alcuna licenza...

(느리게, 노래하듯이, 다소 자유롭게...)


만약 이 교향곡이 한 편의 전쟁 영화라면, 2악장은 참호 속에서 잠시 꺼내 보는 오래된 가족 사진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호른... 침묵의 공간을 일깨우는 기억같은


1악장의 무거운 어둠이 걷히고 나면, 현악기들이 낮고 부드럽게 깔리며 무대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그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호른(Horn) 수석 연주자가 홀로 연주를 시작한다.

차이콥스키는 이 부분에 'con alcuna licenza(약간의 자유를 가지고)'라고 적어놓았다. 악보의 박자에 얽매이지 말고, 연주자의 숨결과 감정에 따라 시간을 늘이고 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명연주로 꼽히는 므라빈스키나 카라얀의 음반을 들어보면, 이 호른 솔로는 마치 누군가가 늦은 밤 홀로 읊조리는 독백처럼 들린다.

그 선율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의 재능은 이제 끝난 것인가"라고 자책하던 중년의 차이콥스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삶과 사랑을 갈구하는 처절한 고백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금관 악기인 호른이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적인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건 금속마저도 한계를 넘은 절박함에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자연의 기적같다.


꿈같은 평화을 깨우는 운명의 문 두드림...


호른의 노래가 오보에와 현악기로 옮겨붙으며 사랑의 2중주가 절정에 달할 무렵, 갑자기 평화는 깨진다.

1악장에서 우리를 짓눌렀던 그 '운명의 동기'가 금관의 포효와 함께 난입하는 것이다.

잔인하다... 가장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 때 들이닥친 냉혹한 현실의 발길질 같다. 아름답게 흐르던 선율은 산산조각 나고, 음악은 비명처럼 치닫는다. 차이콥스키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토록 간절히 사랑을 노래해도,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없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호른의 주제 선율이 돌아온다. 하지만 처음에 불렀던 그 당당하고 낭만적인 톤은 아니다. 한바탕 오열을 끝낸 사람의 젖은 눈동자처럼, 조금은 체념하고 조금은 더 깊어진 소리로 노래는 이어진다.

나는 이 2악장의 마지막, 소멸해가는 소리의 뒷모습에서 차이콥스키 5번 교향곡의 진짜 주제를 읽는다. 운명을 이겨내는 것은 4악장의 거창한 승리 선언이 아니라,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기어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야 만 2악장의 그 '버텨냄'같은...


가끔씩 당신의 삶이 팍팍하게 느껴진다면, 4악장의 팡파르보다는 2악장의 호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차가운 쇠붙이(호른)가 뜨거운 숨결을 만나 가장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 같이 들어보면 좋을...


가장 차가운 지성으로 가장 뜨거운 감정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전설적인 명연주는 호른 솔로의 떨림이 남다르다. 2악장의 호른 솔로와 후반부의 격정적인 운명의 테마가 교차하는 극적인 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해석으로 알려져 있다.


- https://youtu.be/xA50ayxecWI?si=u_oOzR5C1zBfQ_sx


♠ 삶


- 알렉산드르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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