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만든 인류, 인류가 만드는 지구의 미래
※ 이 글은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나는 아웃도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아웃도어 동호인과 아웃도어 관련 기업, 그리고 정부 조직 이렇게 세 축의 공동 노력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세 축이 모두 병렬적으로, 또는 각자 내재한 동력으로 지속가능성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정부 조직은 자기 나름의 목표와 상황 논리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고, 대체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종종 시민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시민이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열렬한 아웃도어 마니아이고, 기업에게는 소비자이며, 정부 조직에게는 유권자이기 때문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업은 태생적으로 이윤을 축소시키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기업 활동의 결과로 환경적 재앙을 일으켰다고 해도 그 처리는 사회 전체 부담으로 떠넘기고 기업은 파산하면 그만이다. 기업은 사람들처럼 어릴 적부터 공동체 의식을 교육받거나 경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성장하면서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인성’이 기업 활동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각성시키고 지속가능성을 위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것은 시민, 즉 소비자들이다. 시민의 각성이 기업의 경영 정책이나 제품의 윤리성 강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2015년을 전후로 우모 제품을 만드는 아웃도어 기업들이 RDS 인증을 받은 윤리적인 우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RDS 우모를 사용하면 생산원가가 상승하므로 주주나 이사회는 자발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당시 많은 동물복지단체들이 동물학대 사실을 널리 공개하고, 소비자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기업은 좀더 비싼 우모를 사용하여도 그게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이다. 착한 기업을 없으나 소비자가 기업을 ‘착하게’ 만들 수는 있는 것이다.
앞서 현대 사회의 소비는 신념 표현의 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상품의 구매, 혹은 불매는 소비자의 권한이다. 더 나아가 마케팅에 대한 반응도 신념 표현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칭찬받아 마땅한 기업의 이벤트에는 비록 그 리워드가 소소하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알리고 참가하며, 진정성이 의심되는데다 지속가능성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면 그 리워드가 아무리 크더라도 배척하는 것으로 신념을 표현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신념 표현은 기업으로 하여금 점점 얕은꾀로 소비자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기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의 신념 표현이며, 시민이자 소비자인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리다.
정부 조직이나 입법부(우리나라의 경우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는 이윤을 목표로 하지 않고, 전체 국민들의 공공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기업과 큰 차이를 갖는다. 대의민주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의 정치체제에서 불행하게도 투표로 선출된 정부나 입법부가 항상 공공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입법하거나 시행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투표 결과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해집단간의 사회적 다툼에서 이익단체로 견고하게 조직되어 있는 집단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도 많다. 특히 환경문제가 야기하는 사회 전체의 손실은 당장 눈에 띌 정도로 크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의 조직되어 있지 않은 시민들은 반대편의 조직된 이익단체보다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지 못하며, 개별적인 시민들의 항의가 정부 조직이나 입법부에까지 전달되는 일은 거의 없다.
설악산에 이어 지리산 케이블 카 설치 소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이상 지리산을 찾지 않으며, 평생 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지리산 케이블 카 설치가 저지된다고 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직접적인 이익이 크지 않다고 느낄 뿐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지역 주민이 아니고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개발 이익을 둘러싸고 강력하게 연합한 집단은 매우 집요하고 일사불란하게 개발을 추진한다. 정부 조직은 그들의 목소리가 더 크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 조직과 입법부가 지속가능성을 위한 정책을 입법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것도 결국은 시민이다. 개발 이익을 중심으로 연합한 집단에 맞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결국 몇몇 사람들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우리는 황폐한 자연환경을 돌려받는다. 정부 조직과 입법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투표와 사회 참여이며, 시민이자 유권자인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리다.
인류는 원하던, 원치 않던 지구에서 가장 책임감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종에 대해 막중한 책임을 혼자 감당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잡아야 농경을 시작한 1만 년 전부터이며, 지구의 미래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한 것은 화석 연료를 사용하면서 촉발된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이다. 인류는 1만 년 전 농경을 시작하면서 위험한 사냥과 고통스러운 기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연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100여 년 전부터 수억 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유기체의 잔존물인 석유를 연소시키면서 추위와 어둠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기후변화의 직접적이며 치명적인 원인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인류 역사를 지구의 역사 46억 년에 비교하자면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었으며, 시계 바늘은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46억 년간의 지구 진화가 오늘날의 현생 인류를 만들었다면, 이제부터 지구의 미래는 인류가 만들어가야 한다. 이성이 작동하는 마지막 지점, 임계점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지금 어디쯤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인간 활동이 직접적 원인이 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지구의 생명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종의 멸절을 눈앞에 둔 친구들. 그들 중에 우리 인류가 포함되지 않리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