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 직무 이야기
"Mㅓ든지 Dㅏ한다" 방송MD를 수식하는 가장 식상한 표현 중 하나이다. 2010년 초반엔 저 표현이 매우 유행했으며, 나도 면접때 이 표현을 언급한 바 있다.
방송과 상품에 대해서는 일면 맞는 말이다. MD의 업무는 우선 상품 기획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 S/S 혹은 F/W시즌에 어떤 브랜드로 어떤 상품을 런칭할지를 먼저 기획한다. 기획 단계에서 타 플랫폼과 홈쇼핑이 가장 다른 점은 두 가지이다. 기획 상품의 가짓수가 적고 대량 수급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백화점이나 e커머스는 다양한 상품을 최대한 많이 진열하고, 소비자가 그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방송은 40분에서 2시간 동안 보여줄 수 있는 상품의 가짓수가 매우 제한적이다. 한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소비자의 선택을 유도해야 하는 구조이다. 따라서 한 명의 MD가 다루는 품목은 시즌당 3~5개로 매우 제한적이다. 보여줄 수 있는 가짓수가 제한적이므로 MD가 디자인에 매우 깊게 관여한다. 디자인, 소재, 컬러, 구성 및 가격 책정까지 전 과정을 MD가 업체와 함께 기획한다.
다행히 그 중 하나가 반응이 좋다면? 바로 다음주, 다다음주에 2, 3회차 방송을 잡아야 한다. 취소 및 반품 수량까지 감안하면 한 시간에 최소 10,000개 이상의 물량을 다음주까지 확보해야 한다. 만약 생산 지연으로 어렵게 잡은 방송이 취소된다면? 날씨는 2~3주 만에도 급변하기 때문에 금방 시즌을 놓치게 된다. 즉, 홈쇼핑에서 성공하려면 디자인 기획 역량과 동시에 한 주에도 어마어마한 생산 능력을 갖춘 업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아무 협력사나 홈쇼핑을 하겠다고 덤벼들 수 없다. 고인물들만 살아남는 세계인 것이다.
상품 기획과 생산 일정까지 논의가 완료되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방송을 준비해야 한다. 보통의 홈쇼핑 방송은 2~3주 전, 늦어도 1주일 전까지는 편성표 작성이 완료된다. 그 절차는 대략 이러하다.
우선 하루 24시간 × 7일의 시간이 분/시간 단위로 낱낱이 쪼개진다. 이는 시청률을 감안한 시간 단위 편성표로 재작성되어 각 영업부서에 배포된다. 영업부서는 희망하는 상품, 그 상품의 총 물량 및 직전 매출, 이를 기반으로 희망하는 방송 시간을 제출해야 한다. 가장 TV를 많이 보는 시청률이 높은 시간일수록 경쟁이 치열하며, 그 시간에 달성해야하는 목표치도 높다.
방송이 잡히면 PD, 쇼호스트, 협력사와 함께 회의를 진행한다. 몇 회차 방송인지, 효율은 어떠했는지, 컨셉은 어떻게 가져갈지 등을 논의한다. 방송 당일이 되면 2시간 일찍 출근하여 스튜디오와 DP 상황을 점검하고 PD와 함께 방송을 운영한다. MD는 모니터룸에서 ‘콜 그래프’를 보며 PD와 실시간 소통하는데, 그래프가 그리는 등고선에 따라 멘탈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마련이다. 방송이 끝난 직후 사후미팅을 진행하는데 방송 실적에 따라 회의 분위기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MD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패션업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다. 1) 어렸을 때 아주 잘 살았지만, 2) 최근에 폭삭 망한 사람이 패션업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릴 때부터 고급스러운 물건이나 서비스에 노출될 기회가 많다. 옷이나 신발도 비싼 것을 까다롭게 골랐을 것이며, 해외에 자주 방문해서 다양한 문화를 접했을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 하이엔드 브랜드, 전시회, 음악회 등 다양한 컨텐츠를 접하다 보면 그만의 기호와 스타일, 즉 취향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렇게만 쭉 살아온 사람은 헝그리가 없다. 월급 몇 푼에 본인의 워라밸을 파괴하면서까지 일에 몰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2번의 의미이다. 상품과 브랜드에 대한 취향과 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집요함과 간절함도 갖춘 사람은 성과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 나는 처음부터 자격 미달이었다. 우리집은 부자였던 적이 없고, 원래 안 좋았던 경제 상황이 20대 때 약간 더 악화되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일이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내가 담당한 카테고리는 여성 백과 슈즈 부문이었다. 그리고 난 남중/남고를 나온, 장교로 제대한지 얼마 안된 선머슴 그 자체였고 평생 핸드백이나 쥬얼리, 슈즈에 관심을 가져본 일이 없다. 부산에서 살았던 20년간 백화점에 방문해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펌프스와 부츠의 차이도 모르는 내가 MD랍시고 당장 협력사가 가져오는 아이템들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우리 팀에는 나보다 몇 개월 먼저 입사한 선배가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약간 어렸고, 가끔 철없고 미숙한 모습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직무 역량 측면에서는 그녀와 나의 레벨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노력의 양으로는 내가 그녀에게 뒤지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패션이나 MD관련 서적과 매거진을 닥치는대로 읽고 뭣도 모르면서 시장조사를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글로 익힌 지식은 25년 평생 소비자로서 관심갖고 살아온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난 팀 내에서 그녀와 자주 비교당했다. 가장 일찍 출근하고, 허드렛일도 도맡아 하고, 업무도 조금 더 잘해보고자 부단히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아직 신입사원이니까 잘 모르고 부족한 게 당연하겠지. 매일 스스로 위로하고 다시 절망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당시의 나는 유관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소통의 대부분이 논리의 영역이 아닌 감정적 호소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MD업무를 진행하다보면 유관부서를 설득해야 할 일이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편성부서와 심의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특히 편성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했는데, 홈쇼핑 회사에서 편성부서는 영업부서에 비해 갑(甲)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채널 편성이 어긋나면 영업부서는 매출을 낼 방법이 없었다.
당시 막내였던 나는 가장 볼륨이 작고 손이 많이 가는 상품들을 주로 담당했었다. 협력사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상품들은 내가 보기에도 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편성 담당자에게는 집요하게 방송 편성 승인을 요청해야 했다. 나의 무기는 내 상품의 매력도 등 타당한 근거가 아닌, 그저 ‘한 번만 봐달라, 잡아달라’ 하는 반복적 생떼였다. 당시 내 사수였던 분은 내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높은 예상 전환율(1-취소,반품율)’을 받아올 것,
과정을 일부 날조하더라도 ‘백화점 입점 상품’ 등의 증빙을 얻어낼 것
등을 요구했고 이러한 소통 방식은 ‘감각의 부족’ 못지 않게 날 힘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