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수정 Mar 07. 2019

700원짜리 분노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죄송합니다. 신용카드 결제가 지금 안됩니다."


국회도서관 지하 매점에 점심 식권을 사러 들어가는 내게 들려온 그 말은 나의 미간으로 날아와 세로의 주름을 만들었다.


대 여섯 명의 이용객은 주섬 주섬 지갑을 꺼내 만 원권, 오천 원권을 내밀며 식권을 받아갔다.

카드 포켓이 달린 핸드폰과 노트북, 텀블러만 들고 있던 나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럼 현금 없는 사람은 오늘 점심을 못 먹는다는 말인가요?"


웃음기가 적당히 들어있었다면 유머가 될 법한 말이었지만, 나의 말엔 스믈 스믈 올라오던 분노가 묻어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도서관에서 준비해놓은 투명한 비닐가방에 노트북과 개인용 소지품 등을 옮겨 담고 가방은 사물함에 넣어두어야 한다. 노트북 파우치나, 신문, 책을 훼손할 수 있는 칼 등은 반입이 되지 않는다. 손에 들린 비닐 가방에 지갑은 들어있지 않았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자판기 커피 하나 뽑아먹을 요량으로 가져온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있었다.


도서관 로비로 올라가며 생각해본다. 며칠 전 친정엄마가 내 대신 택배를 받아준 수고로움에 고맙다며 오만 원을 꺼내 드렸으니 아마도 내 지갑 안엔 이천 원 정도 들어있을 거다. 사물함에서 현금카드를 꺼내 바로 옆 ATM기에서 현찰을 인출했다.


1만 원, 3만 원, 5만 원... 얼마를 찾으실 거예요?라고 ATM 기계가 기다리다 못해 내게 묻는 듯했다. 3만 원을 찾았다. 수수료가 700원이란다. 왠지 700원의 수수료를 내며 1만 원을 찾는다는 게 불합리하게 느껴져서 3만 원의 버튼을 누른 것 같다.


'쳇! 요즘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 짜증 나! 4800원짜리 밥을 먹는데 카드가 안돼서 700원의 수수료를 내고 현금을 찾아 먹어야 하다니...'


수수료 700원이 갑자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분노를 끌고 올라왔다.


'아. 뭐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잖아. 기계가 고장이 날 수도 있는 거지...'


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해보아도 좀처럼 분노가 가라앉질 않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내 걸음이 불량해졌다.

매점의 문을 열고 "옜소! 현찰!" 하고 싶었지만 내 앞에 선 세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카드로 식권을 사고 있었다. 아뿔싸. 내가 1층에 다녀오는 3분 남짓한 시간에 카드 결제가 정상화된 것이다.


기가 막힌 타이밍. 하필 그 3분 사이에 내가 겪은 상황이 어이없어 기어이 매점 주인에게 말했다.


"아! 아까 카드가 안된다고 그래서 현금 찾아왔잖아요! 수수료 700원이나 내고요!"


"어머~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 아유~ 어쩌나..."


"하! 참 나!"


내 손에 작은 파란 식권을 쥐어주며 정말 미안한 표정을 한 여주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애교 있는 목소리로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한다.



'더 특별히 맛있게 먹으라니! 도대체 어떻게 먹는 게 더 맛있게 먹는 거야?'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국회도서관의 식당은 매우 훌륭하다. 4,800원 이란 가격으론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메뉴! 외부 일정이 없는 날엔 국회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나는 어쩜 도서관이 아닌 식당에 가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닐까 라고 자문해본 적이 많았다.


'정말 맛있게 먹어주겠어'라는 분노 섞인 다짐으로 식판을 들고 밥을 담는데, 맨 마지막 반찬통 앞에 서자 내 굳은 마음이 노골노골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아! 봄동 무침이네"


내 입꼬리가 배시시 하며 옆으로 누웠다.


봄이 시작될 때 우리의 식탁엔 냉이 된장국이나 도다리 쑥국 같은 기가 막힌 메뉴들이 올라오곤 하지만 봄동이야 말로 온 겨울 내내 추위를 온몸으로 맞으면 땅바닥에 최대한 낮게 그리고 넓게 자신을 키워낸 불굴의 아이콘 아니던가. 또 아삭하고 고소한 잎사귀를 새콤 달콤 짭짤하게 버무린 봄동 무침은 긴 겨울을 잘 견뎌온 내가 온몸으로 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의식 같은 음식 아니던가.


봄동 무침 앞에서 몇 번이고 집게질을 하던 나는 나의 700원짜리 분노가 갑자기 부끄러워지다가 김수영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중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오래전 보험 설계를 하는 지인이 추천한 변액보험에 덜컥 가입을 했다가 결국은 실효가 되어버렸지만, 그래서 불입한 총금액에 한참 못 미치는 해약금을 받고도 또 사업비 명목으로 15%나 떼어간다는 것을 알고도 그러려니 했던 나는, 고금리의 이자를 내야 하는 대출을 받고 신용관리를 잘 못한 내 탓이라고 여기며, 전 국민이 한 푼 두 푼 모아 낸 세금을 강바닥을 파 헤치는 일에 쓴다고 했을 때도 그리 분노하지 않던 나는 그저 '조그만 700원에 분개하는' 모래보다 먼지보다 작은 존재였다.


무지에 눌리고, 권위에 주눅 들고, 개인의 안위만을 탐닉했던 나란 존재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아내라는 이름으로 남편에게,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에게, 언니라는 이름으로 동생에게,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종업원에게만 맘 놓고 분개하는 옹졸한 반항아였던 것이다.


700원짜리 분노가 70만 원짜리 분노보다 컸던 오늘의 나를 바라본다.


도서관의 오늘 저녁 메뉴가 궁금해진다.


음식이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비오는 어느날의 국회도서관 식당의 계란찜


매거진의 이전글 내 삶에 다시 돌아온 봄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