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고통

<필사 노트> 이명원 "마음이 소금밭인데 도서관에 갔다." 中

by 이수정

<필사 노트> 이명원 "마음이 소금밭인데 도서관에 갔다." 中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보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서늘한 냄새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오래된 인간'이 되어버린 나, 별수 없이 '무화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그런 향기 없는 젊음의 대피소가 기껏 도서관의 지하서고였다. 습기와 책 먼지로 가득한, 어두운 지하 2층의 서고에서 허균의 산문집을 읽었다. 과거에 이미 다 읽어보았던 것인데, 그게 그렇게 새롭게 읽혔다.


(중략)


문인으로서도 허균은 혁신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는 조선의 시단이 당송의 시법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답습하는 것에 반발했다. 그는 '자기만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문사란 '앵무새'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일침을 가했다. 그는 지식인들의 현란한 '문어체'에 대해서도 경고를 보낸다. 명료한 '구어체'의 힘찬 언어를 그는 존중했고, 실제로 그런 글을 썼다.


마음이 소금밭인데도, 되도 않는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고통으로 속이 꽉 찬 개그맨이 사람을 웃겨야 된다는 아이러니가 그런 걸 거다. 내 안의 소금밭을 부지런히 갈기 위해서라도, 그 짜디짠 인생에 정직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허균의 말을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붓두껍'을 닫는다고 해서 문인이 죽는 것은 아니다.




문학평론가인 이명원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즐거운 고통'이라 말한다. 글밥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글도 읽고 쓰기 싫을 때도 써야 할 테니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하겠다. 그러나 '즐거운'이란 형용사를 앞에 붙임으로 결코 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숙명임을 받아들인다.


이제 기껏 나의 일상이나 몇 자 끄적이는 나로서는 숙명으로서의 고통보다는 그저 스스로에게 부여한 약속으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크다. 그깟 매일 글쓰기의 약속이 뭐라고, 누가 나의 그 100일간 매일 글쓰기를 궁금해하기라도 할 것 같냐고 하겠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몇 가지 얻은 것이 있다.


무료한 삶 속에 새로운 긴장이 하나 생겼다. 오늘은 뭘 쓰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나의 글감을 찾기 위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삶 속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은 삶이 이곳저곳을 구비구비 돌며 흐르는 느린 강 같은 삶이 되었다고나 할까?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하나의 모티브를 잡고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보면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상황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내가 보였다. 그리고 내가 이해되었다. 맺힌 매듭이 풀리며 묶였던 자리에 난 자국을 쓰다듬어 주는 시간이 바로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내 인생을 돌아보니, 정말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졌다. 그나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한일 하나는 아들 녀석 잘 키운 건데, 이것도 사실은 내가 잘 키운 것이 아니라 친정엄마를 포함한 가족들의 역할이 컸고, 제일 중요한 건 지 스스로 잘 자란 거였다. 엄밀히 따져보니 그 한 가지도 온전히 내가 잘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브런치에 100여 개의 글을 남겨놓고 보니, 뭔가 조금 해 놓은 것이 있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여전히 주말이면 최대한 뒤로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몇 자 쓰는 의지박약이지만 늘 끝에 가선 '역시 쓰기를 잘했어'라며 스스로를 토닥이며 하루를 끝낼 수 있는 마무리 의식으로의 글쓰기로 자리 잡아 가는 듯하다.


이명원 평론가와는 급이 다르지만 글쓰기는 나에게도 역시 '즐거운 고통'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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