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Basic
10월을 맞이하기 이틀 전 대청소를 했다. 현관과 화장실과 창문틀까지, 온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마음과 일상을 정돈하기에 대청소만큼 확실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청소하는 내내 환기하며 선선한 가을바람을 온 집안에 들임으로써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을 떠나보냈다.
이름을 바꾸는 것, 직장을 그만두는 것, 엄마와의 관계에서 독립하는 것,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이 인생의 중대한 일에 대한 리셋은 삶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리셋이 인생의 어떤 중요한 순간에만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부터 다시 눈 감고 잠들 때까지 인생의 모든 과정이 리셋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누워있는 채로 손을 뻗어 암막커튼을 걷으면 아침 햇살이 온 얼굴로 쏟아진다. 베란다 창문과 안방 창문까지, 두 겹 혹은 네 겹의 창문도 아침의 햇빛을 막아서진 못한다. 실눈을 뜨고 하늘을 확인한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에는 벌떡 일어날 기운이 솟아나고 구름 가득 흐릿한 날에는 왠지 조금 기운이 빠진다. 날씨가 어떻든 상관없이 아침의 태양과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는 순간이 하루 중 첫 번째 리셋의 시간이다. 어쩌면 전날 밤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들 때가 첫 번째 리셋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먼저든 잠을 기점으로 나의 하루는 리셋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불을 정리하고, 양치하고 거울을 바라보며 오늘의 나를 인식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과 아침인사를 하는 순간들. 습관적으로 매일 하는 일이지만, 매일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는 순간들이다.
책을 읽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책 한 권, 아니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종이 위에 글자가 쓰여있는 것뿐인데 그 속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세상이 담겨있다. 새로운 작가 한 명을 만날 때마다 내가 알던 협소한 세계는 리셋되며 나의 세상은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채로워진다. 책을 덮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의 나는 3시간 전 책을 읽기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책에는 강력한 리셋의 힘이 있다.
글을 쓰는 건 어떨까. 나만 보는 글쓰기는 나조차 몰랐던 깊은 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배출하게 한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서의 글쓰기는 내 안에서 꺼내어진 말들을 나조차도 또 다른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혼자 하는 글쓰기이든 공개적인 글쓰기이든, 기록, 표현, 창작 등 어떤 목적을 가진 글쓰기이든 한 문장 한 문장 써내려 가는 모든 순간이 자기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미세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리셋되는 과정이다.
그런 날이 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날은 어둑해졌고, 허무함이 밀려오는 날. 그럴 때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하염없이 걷는다. 신선한 숨을 들이켜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온몸에 에너지가 돌며 기분이 좋아진다.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깨어있는 16시간 중 12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남은 4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하루 전체를 바라보는 마음은 바뀔 수 있다. 시간과 관계없이 언제고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리셋할 수 있는 방법을 수집해 두면 좋다. 나의 경우 산책하기,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어슬렁거리기, 그림책 쌓아놓고 널브러져서 읽기,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하기, 좋아하는 영화 보기, 이케아에서 인테리어 구상하기, 커피가 맛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카페에 가기, 펜이나 노트, 문구용품 구경하기 등등이 있다. 때로는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나에게 허락한다. '나중에 하자.'라며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루 리셋보다 더 자주 누르는 리셋 버튼은 표정 리셋, 말투 리셋, 발걸음 리셋, 자세 리셋 버튼이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걸 알아차리면 얼굴에 힘을 풀고 가볍게 미소 짓는 것, 어깨가 한껏 말려있을 때 몸에 힘을 탁 풀어내는 것, 바닥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무겁게 걷고 있는 걸 알아차리면 경쾌한 발걸음으로 바꿔보는 것, 성의 없고 건조한 말투에 다정함 한 스푼을 끼얹어보는 것.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으로 매 순간을 리셋할 수 있다.
이렇게 매 순간을 리셋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인생이 한순간에 변화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살아있는 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걸 직시한다면, 순간순간의 리셋은 삶 전체의 리셋과 다를 바 없다.
고백하자면 7~8월을 어영부영 보냈다. 매일 하던 글쓰기도 내려놓고 지냈다. 친구들과 시간을 자주 보내고 여름방학에 시골집에 놀러 간 아이처럼 뒹굴거렸다. 한마디로 게으른 여름을 보냈다. 그러다가 선선한 가을바람이 나의 리셋 세포를 건드렸고 9월에는 나 홀로 'Back to Basic'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조깅도 다시 시작하며 1km를 달릴 때마다 1천 원씩 셀프로 기부금을 적립하기로 했다. 매달 4만 원씩 기부하기로 했다. 배달음식에서 벗어나 매일 집밥을 해 먹고 매일의 지출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잠들기 전 일기 쓰기도 시작했다. 몸, 마음, 영혼을 관찰하며 기록하고 감사일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제 와서 갑자기 갓생에 관심이 생겼다거나 특별한 목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일상의 아주 기본적인 것들을 재조율 하고자 함이었다. 글쓰기, 조깅, 요리, 일기 쓰기 모두 갑자기 새롭게 시작한 일은 아니기에 큰 결심이 필요하진 않았다. 산발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작업이었다. 현관에 흐트러진 신발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일상을 정돈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확실하다. 우선 유튜브 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유튜브 좀 그만 봐야지.' 마음먹은 적 없었으나 늦은 오후쯤 되어서야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유튜브를 안 봤네.' 깨닫게 된다. 유튜브 보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가장 좋은 건 남과 비교하는 시간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또, 하루가 넉넉하게 느껴진다. 하는 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느슨하게 살 수 있다. 특별하게 달라진 건 없는데 일상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몸, 마음, 영혼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삶 전체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준다. 꼭 어떤 좋은 결과 때문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감사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9월에는 <라이프 리셋>이라는 브런치북도 쓸 수 있었다. 오랜만의 연재인데 주 3일 연재가 가능할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어느덧 10월이 되었고 이 브런치북도 연재마감을 앞두고 있다.
브런치북이 특별히 인기를 끌었다던가 하는 성과는 없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매일 글을 썼고 또 한 번 삶을 돌아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또 하나의 브런치북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순간을 리셋하는 일도, 하루를 리셋하는 일도, 계절의 흐름에 은근슬쩍 탑승해 일상을 리셋하는 일도, 인생의 중대한 주제를 리셋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것도 없다. 혹여나 지금까지 엉망진창이었던 삶이라고 해도 내가 진실로 다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리셋버튼을 누를 수 있다. 분명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생각보다 변화가 지지부진해서 지치기도 하겠지만, 결코 제자리걸음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선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 몸으로 살아가는 시간은 유한하기에 조바심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고 늦은 시기는 없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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