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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게 나뿐만은 아니니까.

오늘아침, 의식의 흐름대로.

by garden

뭐가 빨라도 빠른 우리 둘째. 여우같은 곰인 첫째에게 느끼는 마음이 속터짐이라면, 언니에 비해 센스도 있고 눈치도 빠른 둘째는 소화제같은 느낌이라 뭘 해도 귀엽지만 귀여운건 귀여운거고, '빠르다'는 점을 이용해 나는 사사건건 챙겨줘야하는 수고로움을 좀 덜고싶다. 이제 너는 아기가 아니니까 네 물건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그래서 일러주면 그녀는 자신이 아직은 분별없고 연약해서 보호가 필요한 아기라는 점을 어필하면서 어물쩡 빠져나가는데 자신의 소지품이나 준비물을 나한테 떠넘기는 그 솜씨가 일품이다. 한편, 그녀는 하교도 혼자 하고 싶어하고 편의점에도 혼자 가서 군것질을 하고 싶어하는데 아직 너는 아기라서 그런건 혼자 하면 위험하다고 하면 본인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이라는 두 개나 되는 기관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엿한 언니라고 야무지게 주장한다. 아기와 언니, 본인은 그 단어들을 요리조리 구미에 맞게 갖다 쓰면서도 편의에 맞게 혼용하는 나에게는 일침까지 놓는걸 보면 둘째는 일곱해 인생에 걸쳐 적절히 낄 때 끼고 빠질 땐 빠지는 눈치 코치를 벌써 깨우친 것 같다.



그런 걸 볼 때면 ‘아, 이 아이는 나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 그건 살아갈수록 A와 B의 중간, 그 어드매에 관한 정답과 적절함의 범위를 도무지 몰라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린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위기, 그에 따른 인류의 멸망. 전세계적인 정치인들의 이권을 둘러싼 개싸움과 그로 인한 긴장을 보자면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서 뭘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행복을 미래로 유예하지 않고 지금만을 누리고 싶어진다. 그러다가도 곧 두 아이가 살게 될 세상과 우리 부부의 노후를 떠올리면 지금 더 모아야하는게 아닐지, 더 벌 방법은 없는지 불안해지는 것이다. 대체 내가 현재 누릴 수 있고 누려도 되는 행복이란 얼마만큼일까. 그건 누가 정해주는 것일까.



얼마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둘째가 태어나전에 갔던, 그러니까 10여년 전에 놀러갔던 여행지에서 남편이 내가 예약했던 숙소에 대해서 불만을 얘기하면서 예정보다 일찍 집에 가자는 얘기를 했었다. 10여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맺혔던 모양인지 종종 그얘길 했었고 이번에는 둘째까지 데리고 그 곳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그 때 그 얘기를 또 꺼냈더니 남편이 말했다.


"그 때 미안했던건 맞는데 10년이면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봐도 되지 않겠니? 좀 이제 잊어버려라. 그런 거 일일이 기억하면 제일 힘든 사람은 너야."


맞다. 나를 가장 지키고 보호하고 싶은 사람은 나인데 내가 그걸 모를리가. 잊어야 산다. 괴로운 일, 떠나버린 인연, 과거의 굴레를 벗어나야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잘 안된다.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억해야 살 수 있기도 하다. 좋을 때보다 미울 때가 더 많은 남편, 이제 사춘기에 들어서 저게 정녕 내새끼가 맞을까 싶은 자식을 한 공간에서 매일 보려면 그들에게 계속해서 내어줄 내 마음이 헐지 않고 남아나려면 나는 떠올려야 한다. 지난 한 때, 이 사람아니면 안된다는 화염같던 내 사랑과 말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그 시절의 작고 말캉한 첫째. 그 기억으로 나는 지금의 그들도 대한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는 날이면 첫째의 무해한 어린시절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남편의 연애시절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거기에 적혀있는 이 단 한줄이 없던 정내미도 더 떨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그에게 등을 돌리는 내 마음을 기어이 불러세운다. 그 힘에는 유효기간도 없는걸 보면 나도 참 속없다 싶다.


"난 너를 몰랐던 그 시절에도 어디서든 너와 함께 있었어, 가든."



어디 그뿐인가. 엄마 아빠가 보호해줘 보드럽기만 하던 내 잠자리와 안전하던 우리동네, 봄이면 지천으로 피던 민들레와 그만큼 지천으로 담벼락을 장식하던 여름의 장미, 지독하게 후각을 자극하던 똥냄새와, 그 냄새와는 판이한 눈부신 노랑을 선사하던 흩날리는 은행잎들. 그런 흔한 풍경과 그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몇 여년에 불과한 기억들로 나는 평생을 산다. 인생이 이렇게 위험천만하고 위태로운 곳인 줄 모르고 겁없이 누비던 그때의 기억으로 살얼음판을 걷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해야만 하는가. 잊고자 하는 것을 빠르게 잊고 기억해야만 하는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려먼 어떻게 해야할까. 그 방법을 여적지 알지 못해 나는 종종 괴롭다. 기억해야 할 것들이 떠오르지 않고 망각해야 할 것들은 지나치게 선명할 때, 더 그렇다.



때로는, 혼란하고 난처한 그 어떤 위로와 정답지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 무언가가 옆에 있어주는 게 더 든든할 때가 있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추천해준 영상들이다. 한쪽에서는 그냥 뭐라도 하라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말란다. 답을 달라는 나에게 더 혼란한 알고리즘의 세계를 선사하는 유튜브. 그래, AI에게도 힘든거였다. 인간사, 세상사라는 광활한 그라데이션과 스펙트럼에서 올바른 위치를 선점하는 일. 기계도 어려운 그 일을 한낱 인간인 내가 아는 게 더 이상하다.



오늘도 사춘기에 널을 뛰는 첫째는 본인의 신상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생활 침해라고 입을 닫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진짜 친엄마 맞냐며 이렇게 무관심한 부모가 어딨냐고 따져묻는다. 위로를 해주면 실질적인 도움을 달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면 어김없이 하는 말,


“ 엄마 T야??”


어디 그 뿐인가. 모르면 물어보라고 해서 물어본건데, 한 번쯤은 생각이라는 걸 해보고 물어보라던 회사의 그 놈. 돈은 자고로 잘 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길래 다른건 몰라도 돈쓰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다고 대답한 나에게 ‘그러니 돈을 못 모으지’ 라며 혀를 차는 우리 엄마. 방금 전까지 여기저기 쫓기듯 매일을 학원을 전전하는 요즘 아이들은 참 짠하다고 생각했다가, 길에서 삼삼오오 모여 베스킨라빈스 씩이나 먹으면서 쌍시옷 욕을 달고 침을 뱉어대는 애들을 보고는 요즘 것들은 참 복에도 겨웠다고 생각하는 남편. 그런 남편을 보고 참 줏대없다고 했는데, 실은 옆에서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나까지.



오늘도 혼란하고 혼탁하기만 한 머리속이지만, 이런 건 나뿐만은 아닐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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