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21. 물푸개-시작노트

by 푸른킴

옛 도성 마을 골목

북적이던 우물터


모두 떠나고

유물만 홀로 남아


마중물 기다리다

끝내 늙어간다―

우리의 시대


배경

서울 전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은 북악산 한양도성을 걸으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출발지다. 그런데 산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도성길을 좀 더 길게 걷고 싶은 사람이라면, 종점까지 가지 않고 북정마을 입구에서 내리기도 한다. 나도 가끔 이 도성길로 돌아 산으로 올라가곤 한다.

요즘도 ‘성북동 쌍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정류장에 내리면 북정마을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바로 이어진다. 다리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1970년대까지는 성북천이 흘렀고, 개천 양쪽을 이어주는 두 개의 다리가 있었다는 데서 ‘쌍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북정마을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쉽지 않은 산 위의 동네다.

며칠 전 바람이 차갑던 날 저녁, 다시 이 길로 들어섰다. 한적한 언덕을 느긋하게 올랐다. 마을버스도 헉헉대며 오르는 길이어서, 걷다 보면 숨이 차는 날이 많다. 언덕이 거의 끝날 자리쯤 왼쪽으로 정자가 세워진 쉼터가 하나 있다. 그 앞에 마을 우물터에서 쓰이던 물푸개 하나가 남아 있다. 모양으로는 아주 오래전 것인데, 이제는 덩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고만 있다.


아마도 수도시설이 변변찮던 시절, 이곳은 북정마을 한쪽 사람들에게 생활용수나 식수를 제공하던 샘터였을지도 모른다. 집집마다 수도시설이 들어온 뒤로 굳이 사용할 이유가 사라졌지만, 이 오래된 유물 같은 작두뽐뿌(물푸개)는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만한 골목들로 얽힌 이 마을이 처음부터 살가운 생활공동체였다는 것을 더 꿋꿋이 보여준다.


사진

이 사진은 몇 채 안 남은 골목으로 휘돌아 올라가는 길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피사체를 한가운데 고정해 두려 했다. 눈을 맞추는 높이가 아니라, 지나가다 문득 멈추어 서서 남긴 것이다. 선의 높이가 중요한 이유는 이 대상을 ‘마주’하게 하기보다 ‘발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푸개는 길가의 증거물처럼 놓여있고, 나는 그것을 우연히 만났다. 한때 생활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중심에서 밀려난 것 뒤에 내가 섰다. 이 사진은 그것의 밀려남을 과장하지도 위로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조용히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작두 모양의 손잡이에 주목했다. 손잡이는 아직도 눌릴 준비가 되어 있고, 물주둥이는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방향은 우연이 아니라 ‘마지막 사용’의 흔적처럼 읽혔다. 누군가가 돌아서며 멈춰 세운 각도. 사진은 그 각도 하나로, 보이지 않는 손의 시간을 나의 기억 속에서 호출했다.


프레임 안에는 콘크리트 경계석, 말라붙은 흙, 낙엽, 그리고 아래로 이어지는 초록색 관이 함께 들어와 있었다. 낡은 철과 새 플라스틱이 한 몸처럼 이어져 있는 장면은 이 사진의 숨은 중심축이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공존한다기보다, 새것이 오래된 것을 대신하면서도 끝내 지우지 못한 상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애매한 접합이 “시간이 겹쳐진 장소”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곳은 단순히 오래된 사물이 남아 있는 자리가 아니라, 살았던 방식이 뒤섞인 자리다.


사진에서 오른쪽 포장된 길의 밝은 여백은 이 시대의 공허를 드러낸다. 마치 “이제 여긴 지나가기만 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밝음에 맞서 녹슨 펌프의 진갈색은 더 어둡게 한다. 녹은 색이 아니라 시간의 질감이다. 그 질감은 자주 사진의 침묵을 깊게 만든다. 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 물의 부재는 오래되었다는 것이 선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부재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물처럼 쏟아졌을 장면이 더 크게 들린다. 이처럼 나는 사진을 통해 물이 끊어진 이곳에서 물의 기억이 이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상상이 이 사진 너머에서 더 크게 밀려오는 듯하다.


시어

이 시에서 나는 제목을 먼저 결정했다. 이 풍경을 보자마자 ‘물푸개’라는 이름을 떠올린 것이다. ‘마중물’은 그 제목에 어울리는 동기어였다. ‘물푸개’와 ‘마중물’.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이 불가분성은 단지 단어만의 결속이 아니다. ‘작동’, 즉 물푸개의 생존 조건이 마중물이라는 것이다.


물푸개: ‘물푸개’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선택한 이 단어는 설명을 요구하기보다 기억을 먼저 자극한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름이다. 어떤 이에게는 곧바로 손잡이(작두)를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 단어를 제목으로 결정하는 순간, 나는 사진 속 대상을 단순한 ‘펌프’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의 생활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은 사물을 되살리고, 그 사물은 말속에 담긴 삶의 퇴적을 증명하는 경우가 많다.


마중물: ‘마중물’은 의미적으로 “처음 붓는 물 한 바가지”다. 도구가 작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물의 양이 아니라 그 물이 가진 관계론적 의미를 더 주목했다. 마중물은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고,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삶의 물은 솟구친다. 그런 점에서 ‘마중물’은 사소한 준비가 아니다. 오히려 거대한 세계를 다시 작동시키는 최초의, 미시적인 행위다. 나는 ‘무엇이든 살아 움직이려면, 누군가 그 단초를 잡아당겨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마중물은 어느 삶에서나 역동하는 모든 행위의 첫걸음이다.


옛 도성 마을 골목 / 북적이던 우물터: 이 표현에는 시를 시공간적으로 고정하는 동시에 ‘마중’의 관습과 추억의 정서가 담겼다. ‘마중’은 단지 기다림이 아니다. 길 밖으로 나가 직접 맞이하는 몸의 의례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우물터는 물을 얻는 장소이면서 사람을 얻는 장소였을 것이다. 도성 밖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옹기종기 삶을 엮었던 이 길 사이사이 사람들로 북적였던 때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물을 길어 나와 누군가 마중물을 붓고 땅 아래로부터 물을 끌어올리는 행위는 나와 너의 생존이 만나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삶은 역동했을 것이다. 약속하지 않아도 서로 마주치는 행위에서 웃음은 서로를 엮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북적이던’이라는 형용사는 바로 이 골목의 밀도를 한 단어로 환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모두 떠나고 / 유물만 홀로 남아: 하지만 그 ‘북적이던’ 삶은 이제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감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어에는 이 시의 내용적 구조가 담겼다. ‘떠남’은 개인의 이사나 세대교체만이 아니다. 더는 모일 이유가 없는 모임의 소멸이다. 70년대 중반 수도시설이 확충되면서 동네의 물푸개는 더는 제 기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쓰지 않고, 모이지 않아 그 기능이 저절로 사라진 것이다. 모두 떠났다. 이 장소에는 듬성듬성한 관계만 남았다. 사회관계가 흩어지듯 우물가의 자리도 점점 더 비어갔다. 그런데도 물푸개는 남았다. 남겨졌다. 땅 아래 굳게 박아둔 파이프를 따라 생의 의지를 더 깊이 박아 두었다. 하지만, 스르르 녹슬어가는 세월의 힘은 어쩔 수 없었다. ‘홀로 남아’라고 표현한 시어는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그 홀로 있음이라는 쓸쓸함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방식’도 그려준다. 시나브로 사라지는 관계, 그 틈에 자신도 모르게 오래된 삶의 흔적이라는 ‘유물’로 남는 과정이다. 이 물푸개는 그저 길가의 장식이 아니라, 사라진 관계가 이곳에 있었다는 역사의 기억물이다.


마중물 기다리다 / 끝내 늙어간다― / 우리의 시대: ‘끝내 늙어간다―’는 늙음이 완료가 아니라 늘 진행형이라는 의미다. 유물마저도 ‘이미 늙음’이 아니라 ‘늙어가는 중’이다. 역설적으로 이 진행형은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는다. 언제든 뒤로도 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진행형은 단순히 시간의 전진만 반영하지 않는다. 누구든 이 유물에 개입하기만 하면, 삶을 새로 시작될 수 있다. 하늘에서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작두는 그 비에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한 손에 받아 든 마중물과 다른 한 손으로 내리누르는 작두의 움직임이 만나기만 하면 이 죽은 듯한 물푸개가 되살아난다. 그 ‘동시 행동’이 생존의 원동력이다. 물을 천천히 붓고, 조금씩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땅 아래 물이 솟구친다. 이 장치는 삶에도 그대로 대응한다.


그래서 마지막 시어인 ‘우리의 시대’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를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시대를 향한 질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마중물은 어디에 있는가? 왜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은가. 동시에 이 질문에는 물푸개가 녹슬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는 나의 확신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시대도 늙어가는 중일뿐,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시는 그 늙음을 쉽게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낙관한다. 마지막 줄에 덩그러니 남은 ‘우리’는 그 희망의 전조를 함의한다.


결국, 이 시어들은 사진 속 물푸개의 존재, 그 실존을 인간이 영위하는 공동체성의 비어있음과 새로운 활력을 연관해 보는 데 주력한 작은 흔적이다.


의도

나는 이 시에서 이 유물 같은 물푸개를 단순히 ‘옛 물건’으로 박제하지 않고, ‘우리 시대’를 비추는 한 거울로 쓰려 했다. 사진 한가운데를 차지한 물푸개는 옛사람들에게 삶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 개별로 존재하는 이들이 한자리에서 공동체로 이어지던 잔흔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마중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러 영역에서 살아남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발원한 시원지는 이미 우리 삶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나는 여기서 단어의 효용을 다시 생각하려 했다. 삶은 흩어져도 단어는 살아남아 그 지난날들을 지금 여기에서 추억하도록 이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특히 마중물은 잠재된 물을 끌어올리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삶을 역동하게 하는 힘도 거시적인 담론이 아니라 미시적인 삶의 고백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었다. 따라서 ‘홀로 남은 유물’은 역동하는 세계를 위해 자기 삶을 기투한 어떤 삶의 최후 흔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특히 내가 제시한 이 디카시의 배경에 이 동네로 향하는 버스 동선이 있다. 한성대입구역, 성북동 쌍다리, 북정마을 언덕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나의 의도를 뒷받침하는 이 디카시의 몸통이다. 가끔 숨이 차는 그 언덕길을 느긋하게 오를 때,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스며 있는 현재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디카시는 과거 회상이라기보다 현재형의 삶에 대한 작은 진단이다. 그 진단의 핵심 문장은 결국 하나다. 마중물이 없으면, 땅 아래 스며 있는 물은 올라올 수 없다. 따라서 나의 의도는 이런 작은 움직임이 시대의 삶을 지금 여기에 일깨운다는 어떤 알레고리다.


총평

나의 디카시 「물푸개」는 사진과 시어의 긴장감이 중요하다. 시어가 사족처럼 보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있었을 이 도구를 누구나 어린 시절 한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도구에 스민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시어–배경이 서로를 과잉 설명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어가 사진 너머의 세계를 좀 더 심화해 주는 것도 중요했다. 따라서 시어와 사진이 하나의 축으로 단단히 엮여야 했다.


그러면서도 시어와 사진은 삶의 과거를 역사처럼 되살려주고, 그 역사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여기에서 복원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도 말해 주어야 했다. 어쩌면 이런 점이 이 디카시의 가치를 일깨우는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만약 이 사진에서 물이 사라진 물푸개가 선명하고, 동시에 그 사라짐 뒤에 ‘마중물’이라는 기억이 끼어들어 마치 물을 뿜어 올리는 어떤 사람의 행동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차게 보인다면, 나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한 것 같다.


끝으로 이 디카시에서 사용된 언어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회상,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언어의 절묘한 이어짐이 살아 있다면, 어느 정도 시작(詩作) 목적에 도달했을 것이다. 우물터는 물을 매개로 개인의 생존, 사회의 공존, 나아가 세계의 항존이라는 세 층이 엮인 사회적 헤테로토포스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들렸다면, 나에게 충분히 만족스럽다.


정리하면, 만약 이 디카시가 좋게 읽혔다면 그 이유는 이 시의 끝에 실린 ‘우리의 시대’가 곧 ‘나와 너, 그것’이 어우러진 삶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삶의 향수를 쉬운 위로나 기억으로 마무리하길 원하지 않았다. 이 시는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금’의 의의를 되묻는다. 그리하여 나는 늙어가는 것은 유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대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이 시대의 늙음은 자연현상으로만 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가 다시 붓고 움직이는 행위의 부재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그래서 이 디카시는 과거의 사라짐을 슬픔으로만 서술하려 하지 않는다. 그 회환과 슬픔을 질문으로 남겨두었다.


“나야말로 다시 마중물을 붓고, 죽은 듯한 그것을 다시 움직일 의지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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