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당해 봤습니다 사기
연일 뉴스에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기꾼의 행보가 오르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그의 사기 행각에 분노를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과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피해자에게도 의심 또는 조롱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방송 프로에 나와서 하는 분석을 보아도 피해자의 유명세와 인지도를 보고 피해자를 믿고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과연 피해자가 아무런 사심 없이 사기꾼에게 바보처럼 속았나 하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뭐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설마 애까지 있는 사람이 국가를 대표하여 운동을 하고 체육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까맣게 임신에 대해 속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주변에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나 내가 사기를 당할 뻔했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사기꾼들은 정말 교묘하게 피해자와 신뢰관계를 만든다. 재벌 3세 뉴욕거주라는 허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보그병신체의 말처럼 사기꾼은 신뢰를 이용한다.
이번 해프닝은 아직 누가 어디까지 피해자이고 누구의 잘잘못으로 누가 피해를 봤는지 명확하게 가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기당할 뻔했던 사례를 소개하고 피해자들이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믿게 되는지 자칫 사기를 당하는 피해자가 문제라는 식의 접근을 변호하고자 내 사례를 소개해 본다.
내가 당한 사기의 방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접근
2. 자신의 부유한 배경에 대한 정보
3. 자신의 배경에 대한 의심 차단
4. 작은 거래, 이득, 배경에 대한 증명을 통한 신뢰구축
5. 목표가 원하는 것에 대한 파악
6. 목표가 제발로 찾아오게 하기
이번 사건은 피해자가 상류층들이 많이 다니는 펜싱클럽을 운영했고 본인 역시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사기꾼의 표적이 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사기꾼들은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돈이 적으면 적은 대로 언제 어디서나 범행 대상을 노린다. 중고 물품을 살 때 무심코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게임을 하다가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친구를 사귀다가 정말이지 언제 어디서든지 당할 수 있다.
내 경우는 중국 상해 주재원 시절이었다. 다른 주재원들에 비해 어린 나이에 발령을 받은 나는 나보다 10 여살 더 많은 주재원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현지의 교민 사회에 들어가 놀고 싶었다. 그래서 교민들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여기서 타깃이 되었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사람을 제일 조심해라'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해외에서 한국사람만큼 서로를 잘 도와주는 사람도 드물다. 교민들 커뮤니티에 들어간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금세 발견하였고 가끔 술도 마시고 여행도 다니며 어울리게 되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경험이 더 많으면 도와주고 힘들 땐 서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SO사의 주재원입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첫 만남에 그가 말을 해줬다. 나도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는 회사의 주재원이었고 크게 의심할 거리도 없는 것이었다. 교민 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이상 작은 사업을 하는 교민들과 현지 직장인, 유학생들이 대부분인 커뮤니티에서 높은 연봉과 집을 보장받는 주재원은 괜찮은 포지셔닝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개중에는 우쭐거리는 듯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나 역시 당시에는 자신만만하고 남들 보기엔 고깝게도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SO사의 주재원이라는 것은 나에겐 의심할 가치도 없는 그래서? 그게 아니라면 어떻고 맞다면 뭐? 비슷한 처지? 정도의 일이었다.
"Y대학교를 나왔습니다."
역시 한참을 얘기하다가 또 저런 얘기를 해줬다. 대학교 간판.. 중요하긴 하지만 뭐 그 당시에 나로선 대학교 간판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가 더 재미있는지 누가 더 잘 노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누구 대학간판이 좋다고 해서 내가 득 될 일을 뭐가 있을까?
"상해에 집을 살 계획입니다."
여기에는 좀 주눅이 들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게 올라버린 상해의 집값이지만 그 당시에는 직장인들이 무리하면 살 수 있었다. 상해의 집값 버블이 먼저 부풀어 오르고 한국이 또 한 번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 두 번을 겪으면서도 집을 사지 않았으니 스스로 사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후..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저런 정보들은 다 거짓이었고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그는 나름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부러워할 만한 정보들을 던지고 다녔던 것이다. 대부분은 나처럼 뭐 저런 게 거짓말이겠어?라고 생각을 한다. 이번 사건에서는 자기가 재벌 3세 라거나 그룹을 승계한다거나 무슨 사업에 투자한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겠다.
저런 혼자만의 주장들은 의심이 많거나 훗날의 나처럼 이미 사기를 겪어본 사람들은 잘 믿질 않는다. "아.. 그런가요?" 이 정도로 하고 확신이 들 때까지 중립지역? 그레이 존 같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부자라고 주장하거나 재력을 과시할 때 나는 이 사건에 배운 교훈 대로 판단을 유보한다.
사실 돈자랑을 하면 나는 거의 100% 그 사람은 사기꾼이거나 그냥 돈이 없는 사람의 허세라고 생각한다. 돈이 적당히 많은 사람은 자신이 돈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은 항상 자기 수준에 맞춰서 더 위를 보기 때문이다. 또 정말 많은 사람은 돈자랑을 꺼린다. 피곤한 일을 많이 당해서 이다. 그런데 굳이 돈자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것은 무엇인가를 노리는 미끼 거나 무엇인가의 결핍으로 본다. 이 것은 내가 알아낸 제법 신뢰도가 높은 나의 발견 중에 하나다.(우쭐)
어쨌건 이런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보완할 2차 TMI를 살포한다.
"중국어를 잘 못하고 부임한 지 얼마 안돼서 회사일을 잘 몰라요"
종종 듣는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말은 무엇인가 회사 얘기가 나왔을 때 회사원이 아니라는 것을 들킬까 봐 한 말이었다.
"저 Y대 게임 특기생으로 들어갔어요."
아.. 그랬구나... 그런데 그게 뭐? 사기꾼은 학벌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티가 날 것이 두려웠나 보다. 말에 Next time 이라든지 I am 신뢰에요 이런 유식한 말을 섞어 쓸 지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애초부터 나는 Y 대이긴 하지만 게임 특기생으로 들어왔으니 의심하지 말라는 밑밥을 깐 것이다.
"부모님이 늦둥이를 입양해서 키워서 제가 생활비를 다 대고 있어요"
캬... 그런 사연이... 정말 어느 소설에서 가져온 설정인지 스토리 구성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 말을 왜 했나 싶었더니 주재원인데도 불구하고 명품이나 행색이 부유해 보이지 않아서 그것을 의심할까 봐 한 말이었다.
이번 사건에서도 똑같다. 재벌 3세인데 왜 이렇게 사느냐? "혼외자입니다.", 돈이 왜 없느냐? "승계를 위해 현금이 다 묶였습니다." 등등 이렇게 재벌인데도 불구하고 너한테 돈을 빌려야 하는 이유를 만든다. 그놈의 가정사는 꼭 들어가야 하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가?
"환전을 못해서 그런데 10만 원 반 빌려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작은 돈을 빌려갔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돈을 빌려갔다. 물론 제깍제깍 갚았다. 진정한 떡밥이었다.
"아 나 회사 문서를 받았는데 해석이 안되는데 이거 무슨 말이야?"
SO회사의 로고가 선명한 문서였다. 열심히 해석을 해줬다. 애초에 의심도 안 했지만 당연히 그 회사를 다닐 것이라 생각했다.
이 신뢰 쌓기가 무서운 것인데 절대 내가 스스로 물어보거나 자기가 알려주지 않는다. 우연한 계기로 내가 아 그사람 SO사 직원이 확실하군 아 그사람 돈 관계에 바르군 이렇게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도 이런식으로 단계적으로 우리는 모르는 신뢰를 구축하는 작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드러나고 보면 말도 안되는 것을 믿었냐 하겠지만 솥안의 개구리는 물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못느끼는 것이다.
위에 모든 작업이 사기를 치기 위함이라면 그래서 결국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속여서 빼앗아야 한다. 그것 역시 티 나지 않게 움직였다. 돈거래를 하고 술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한창 이슈인 상해의 집값버블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내 약점이었다.
"너 상해에 집 가지고 있다며? 어떻게 산 거야?"
나는 진정으로 마음이 동해서 물었다. 그 당시 이미 회사에 상해 부동산 거품에 승차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해 버린 직원들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이 투자를 안 하고 있는 나를 바보 취급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동산 선배인 그에게 집 사는 방법에 대해 내가 먼저 물어봤다. 그렇게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우시(상해 근교도시 상해를 서울로 보면 동탄 정도?)에서 여기까지 운전해서와? 차는 어떻게 샀어?"
차가 있어야 여자친구가 생긴다며 자기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줬다. 너무 미인이었다. 역시 집과 차가 있는 그는 그런 미인이 생기는구나... 노총각인 나는 초조해졌고 차를 사는 방법을 물어봤다. 그렇게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혼자만 만나지 말고 나도 좀 소개해줘"
그의 여자친구 사진을 보고 정말이지 부러워 죽을 지경에 처한 나는 애가 타서 말했다. 그는 지독하게 소개를 안 해줬다. 왜냐... 자기 여자친구도 도용한 누군가의 사진이었을 테니...
이 부분이 바로 이번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약간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재벌 3세와 결혼을 하고 싶었나? 외로웠나? 사기꾼이 주장한 바를 사실로 믿었다면 피해자는 무엇에 마음이 동해서 아가리로 걸어 들어갔을까? 내가 알기로 사기꾼은 절대 먼저 투자를 권하지도 않는다. 그저 피해자가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그쪽으로 유도할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큰 피해는 피해자가 가장 원핸던 무엇인가라는 말이 된다. 이번에는 무엇인가 말이 잘 안 맞는 느낌이 든다.
집을 사고 싶어서 그에게 코칭을 받은 나는 현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은행에 가서 대출을 알아봤다. 당시 나는 워킹비자를 발급받은 지 얼마 안돼서 신용이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중국은 대출 한도를 사정없이 열어줘서 90%까지 대출이 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안돼서 못 받다니 억울했다. 돌아서는데 은행원이 잡았다. "너 집이 얼마라고? 2억? 우리가 2억짜리 신용카드를 만들어 줄게, 대출 자격은 안되지만 신용카드는 괜찮아!" 이게 부동산 열풍기의 상해의 모습이었다. 지금생각하면 안 산 내가 바보지만 샀어도 사기를 당할 것이었으니 빚 2억을 번 셈.... 인가... 위로해 본다.
2억짜리 신용카드가 나오면 차는 나중에 사면된다. 차는 일단 미루자고 집을 산다음에 사자고 했다.
여자를 소개해달라!
나의 이 주장이 그를 가장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집이랑 차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있었지만 여자 소개는 조연배우도 필요했고 그 사람과 합도 맞춰야 했다. 하지만 나는 강경했다. 노총각이 여자도 없이 짐이며 차가 무슨 소용이냐, 또 여기서 결혼을 안 한다면 상해에서 내가 무슨 집을 사고 차를 사는가 현지 여친 없이는 투자하고 싶지도 않다.라는 게 나의 태도였다.
한심할 정도로 뭐시 중한지 모르는 ㅋㅋㅋ 여자에 환장한 놈이었다. 그게 나를 살렸다.
내가 그를 달달달 볶으면서 집을 사려는 액션은 취하지 않고 여자 타령만 하자 그는 어디선가 여자를 하나 물어왔다. 무려 "상해 외국인 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영어는 잘하지만 중국어는 못해서 외롭다는 것, 상해에서 정착하고 싶지만 모아둔 돈은 없다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나랑 너무 잘 맞는 상황이었다.
사진은?
오. 마.. 이.. 홀리.. 지저스.... 버진.. 메리... 세인트... 조셉....
너무 예쁜 그녀
나이는?
23세... 응? 23세? 나랑 7살 차이인데?
아... 그럼... 될 리가.. 없잖아..
아.. 걔가 괜찮다고 했다고?
그럼 내 사진은 걔가 봤어? 아직이야? 그럼 내 사진을 보내봐
뭐? 내 나이에도 불구 내 사진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다고 했다고?
여기서 나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
씁쓸하지만.......
그럼... 나 그 사람 연락처 줘바 내가 연락해보자
다음에 우리 투자하러 상해 갈 때 그때 계약 끝내고 직접 만나자 기분 좋게
아니... 나 그 사람이랑 얘기를 해보고 싶어 내가 왜 좋아..? 그냥 내가 킹차 갓무직 아니 주재원이어서 아냐?(아직 안 깼음)
나는 내 배경이 아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연락처 먼저 줘바
응 내가 물어보고 줄게
그리고 그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는 한동안 그게 내가 소개팅 앞서서 너무 그를 채근해서라고 그의 여자 친구의 친구인 소개팅녀의 심정을 거슬러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바보야... 너 집 사러 갈 때 네가 만들어둔 그 현금을 노린 거네..... 그거 안되면 차 계약 할 때 그 돈이라도 노린 거네... 그러다가 네가 소개팅녀 때문에 계속 판을 깨버린 거네...라는 깨달음이 얻어졌다... 당시 간절했던 나의 애정 욕구가 나를 구한 것이었다.
써 놓고 보니 이번 사건도 내 사건과 비슷했는데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두고 판이 커져서 패를 대중 앞에 공개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되었다. 나의 사견으로는 둘 다 서로 모종의 목적을 위해 계속해서 무리한 배팅을 콜 하다가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사건이 결국 이렇게 끝이 났다고 본다. 내 사례를 바탕으로 뇌피셜을 써보자면 진청조는 남현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재혼이라는 것을 파악했고(혹은 이 와중에 남자라는 속물에 대해 완전히 환멸을 느껴서) 여기에 사기꾼 남자 배우를 세운다면 그 남자 사기꾼이 혼자 독식할 것을 두려워 해서 스스로 나섰다고 본다. 그것을 왜 남현희가 받아들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역시 내 사기꾼이 여자 배우를 섭외해서 둘이 협동해서 사기를 쳤다면 나는 아마 빚도 내서 퍼줬을 거라 생각하니 두렵다.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를 보면 사기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 말한다. 사기는 세상을 너무 모르는 사람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간다. 사기꾼은 내가 원하는 바에 맞춰서 설계를 한다. 그 설계에서 내가 객관적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태도 때문에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ㅂ
그럼 억울한 피해자들이 더 안 나오기를 바라며 나의 일화 소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