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주말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미(South America)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라는 긴 이름의 수도를 가진 아르헨티나(Argentina)가 연상되곤 했다. 반도네온의 선율에 맞춰 유럽 이민자들이 항구에서 추었던 탱고, 뮤지컬 에비타로 유명한 "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노래의 실제 주인공 에바 페론(Eva Peron)의 이미지가 강렬했던 탓일까?
마침 토요일이기도 해서 주말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돌아볼 수 있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레콜레타(lecoleta)로 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동묘지인 이곳은 사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이나 작가, 과학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인데 일반인은 작은 묘소에 안치되려면 5억 이상이 필요하다니 가히 부자들의 사후세계라 할만하다.
레콜레타에는 에바 페론의 묘소가 있다. 영화배우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었고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파격적 복지정책을 실현하다가 33세에 요절하였으니 그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태리산 대리석으로 장식되어있다는 에바 페론의 묘소 앞엔 꽃이 시드는 날이 없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단이다. 파격적인 복지정책으로 노동자와 서민에게 존경받았으나 포퓰리즘으로 경제를 피폐하게 했다는 거센 비판도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던 에비타가 아르헨티나 최고 부자들의 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그 극단의 아이러니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지도 모르겠다.
레콜레타에서 나와서 바로 옆 작은 교회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공동묘지에 들렀다가 교회에 들어가는 기분이 무척 경건해진다. 비록 묘지지만 화려한 레콜레타와는 달리 이 작은 교회는 여행자에게 잠시 숨고를 시간을 준다. 비록 종교는 없지만 이런 성소의 엄숙함에 마음이 차분히 정돈됨을 느끼게 된다.
레골레따를 가장 먼저 들른 것은 오늘 밤 이 근처 공연장에서 열리는 특별한 공연을 예매하기 위해서다. 공연 예매도 하고 주말이라 벼룩시장이 서는 거리를 돌아다닌다. 오전이라 작은 예술작품들을 진열하고 있는 손길들이 바쁘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디자인의 마테차 잔을 파는 노점, 나무로 만든 예쁘고 특이한 액자를 파는 사람, 어떤 곳은 가죽 가방을 진열하고 있고, 또 어느 노점에선 더운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핸드메이드 니트를 걸어 놓기도 한다. 저마다 특색이 있어 눈요기엔 좋은데 카메라를 거부하는 노점상들이 많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생각하는 것이다. 사진은 찍을 수 없지만 그 당당한 자존심은 보기 좋다.
커다란 개를 끌고 산책하는 여자, 이어폰을 꽂고 운동하는 남자,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노부부와 마주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토요일 오전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 여유를 즐기는 현지인들처럼 공원들을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으로 간다. 어떤 이들은 여행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필수코스라고도 하지만 내 경우는 가고 싶은 곳들만 선별해서 가고 가지 않는 곳도 많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MALBA : Museo de Arte Latinamerica de Buenos Aires)은 볼리비아에서 만났던 미술학도가 추천하기에 기억해뒀다가 일정에 넣었다. 어느 재벌이 설립한 곳이라, 그의 개인 소장품을 중심으로 예술성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라틴아메리카의 현대 미술작품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자화상과 그녀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Diego Libera)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정열로 상징되는 강렬한 색채감의 이면에 세계 열강의 지배하에 버텨낸 강인함이 느껴지는 라틴아메리카만의 특색 있는 현대미술을 접한다. 적절한 감상이 떠오르진 않지만, 문외한의 눈에도 그 색채나 표현방법, 혹은 소재가 유럽 등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느낌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남미의 정열을 쏟아부은 듯한 화려함이나 민중의 애환을 그린 사실적이면서도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자니 창작품을 빚어내는 예술가의 혼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사진 절대 금지인 벼룩시장 아티스트들의 소품들과 라틴 아메리카 미술관의 대작들 모두 여행자에겐 감동이다. 그 세계를 인정받은 거장이든, 소품을 팔아 생계를 잇는 거리의 예술가든 내게는 “창작”이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로 보이고 그들의 열정과 재능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시원한 미술관에서 나와 화창한 거리를 걷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부촌인 지역이라 유명한 공원, 광장들이 많다. 이름도 “칠레 광장”, “우루과이 광장”처럼 남미의 다른 나라 이름을 딴 광장들이다. 한 가지 의문점은 토요일인 오늘 이 좋은 공원에 나온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사실이다. 겨우 몇 명의 사람과 쉬는 듯한 택시 몇 대가 광대한 광장이나 공원들에 있다는 게 이해가 잘 안 간다.
한창 여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햇볕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해진다. 동행이 우산을 꺼내 펴 든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엔 제격이다. 지나던 여자에게 길을 묻다가 잠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햇빛을 즐기지 않고 가리는 게 이상하다면서도 재미있다고 웃는다. 그러다가 진지한 눈빛으로 가방을 조심하라고 경고도 해준다. 나쁜 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따로 있다. 대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현지인의 배려가 고마워서 함께 웃는다.
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곳은 나시오네스우니다스 광장(Plaza de las Naciones Unidas)이다. 남미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스페인어를 몰라도 대강 뜻을 짐작할 수 있다. "Naciones Unidas"는 아마 "United Nations(UN)"일 것이다. 그러니깐 이 광장의 이름은 유엔 광장쯤 될 것이다. 각 나라 이름이 붙은 광장들 중 가장 중요한 광장인가? 이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꽃 조형물이라는 플로라리스 헤레니카(Floralis Generica)로 유명하기도 하다.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커다란 호수 가운데 인간이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낮에는 활짝 피어나고 밤에는 오므라들기도 하는 꽃으로 환경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작품이라고 한다.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는 플로라리스 헤레니카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꽃잎에는 호수의 물과 둘러싼 나무의 푸르름이 거울처럼 비친다. 꽃잎의 안쪽은 위를 향하니 하늘이 비칠 것이고 바깥쪽은 땅위의 풍경을 비춘다.
유서 깊은 도시인만큼 유명한 백화점들도 많다는데, 아바스또(Abasto)백화점이 바로 그런 곳이다. 19세기 초에는 과일시장이던 곳이 현대적인 백화점으로 변신했다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백화점 앞에는 먼저 다녀온 레골레또 지구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다. 아까 그 푸르고 넓은 공원에 비하니 백화점의 혼잡함이 싫어지는 것은 여행자가 느끼는 여유의 한 조각일 것이다. 창문에 비친 구름만이 여유로워 보이는 도심 풍경이다.
아르헨티나의 명물 쇠고기 스테이크를 푸드코트에서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육질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소들은 팜파스의 들판을 행복하게 뛰놀며 오로지 풀만 먹고사는 행복한 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육식을 많이 즐기지 않지만 아르헨티나에 왔으니 즐겨보기로 한다. 점심도 먹을 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백화점도 와볼 겸 겸사겸사 이곳으로 온 것이다. 주문을 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뒤돌아 고기를 굽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감자칩과 샐러드와 함께 나오는 소고기는 진짜 맛도 좋다. 안심과 등심 정도를 시킨 것 같은데 2인분으로 셋이 배가 부르다. 일회용 포크 나이프이지만 스테이크는 질이 좋다. 맛있고 싼 점심을 먹고는 오랜만에 아이쇼핑도 실컷 해본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답게 아이스크림이나 피자가게는 100년 이상 되었다는 유서 깊은 가게가 많다. 스타벅스를 이긴다는 아르헨티나 고유의 프랜차이즈 카페 "아바나(Havana)"는 가는 곳마다 있다. 아바나에 들어가 비싸지 않은 커피와 이곳 사람들에겐 명물 간식이라는 초코파이 비슷한 알파 오르(Alfahor)도 먹어본다. 이국적인 거리에도 저녁이 찾아온다. 여행길에선 힘들고 입맛이 마른다는데 운동량이 많아져서 먹는 양도 엄청 늘었다.
아침에 예매한 뿌에르사브루따(Fuerza Bruta) 공연을 보러 간다. 뿌에르사브루따는 난타처럼 유명한 아르헨티나식의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다. 무대 위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긴 하지만 공연은 서 있는 관객과 함께 만든다. 스태프들이 서있는 관객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무대를 만들기도 하고 어두워진 무대에서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현대인들의 애환을 연기하기도 한다.
정작 무대는 객석 앞이었다가 뒤였다가 중앙이다가 하늘이 되기도 하고 손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내려앉기도 한다. 무대라는 인식조차 없는 차원이 다른 공연이다. 튼튼히 만들어진 유리나 아크릴 같은 투명한 막에 물을 채워 바로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어떤 무대장치인지 하늘에서 인간의 몸을 움직여 예술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연기자들이 하늘을 마구 날아다니기도 하고 우주의 끝에서 지구로 들어온 외로운 여행자 같은 퍼포먼스가 계속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서있는 1시간 내내 이리 몰리고 저리 쓸리면서 느닷없이 주위에 나타난 연기자들과 한바탕 춤을 추기도 하고 쏟아지는 물세례를 받기도 한다. 스태프와 음악, 조명, 무대장치, 연기자, 관객, 연출자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고 어떤 장면도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의 머릿속은 대체 어떤 종류의 창의력으로 가득 찬 걸까? 사실 이 공연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보면 알게 된다는 말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돌아다녔던 에너지가 단 한 시간의 공연을 즐기느라 모두 소진된다. 공연을 마치고 연기자들과 기념촬영을 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올해 1월에 한국에서 공연을 했었다며 반가워한다.
온종일 예술작품을 많이 접해서인지 눈도 머릿속도 모두 상쾌하다. 상상 이상의 세상을 맛보는 기분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토요일 밤의 열기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가 나온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공연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사람들과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간다. 하긴 남미에서 밤 10시는 저녁 먹기 적당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