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피츠로이산을 조망하며 걷는 발걸음
엘찰텐(El chalten)은 피츠로이산(Cerro Fitz Poy)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 가는 곳이다. 요 며칠 다녀온 토레스델파이네, 페리토모레노 빙하와 이곳 피츠로이산이 모두 남미대륙의 남단,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사이에 펼쳐진 파타고니아 지역에 분포한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엘칼라파테에서 버스로 4시간을 달려온다. 버스 안에서 보이는 경치 또한 놓칠 것 하나 없이 아름답다. 하늘에 구름이 떠있는지 구름에 하늘이 떠있는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구름 사이를 파란 물감으로 붓질한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을 만나는 것은 파타고니아에서는 그저 일상이다.
이곳부터의 세계 각국의 대도시까지의 거리가 표시된 이정표는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서울까지 17,931킬로미터, 여기에서 서울은 도쿄 다음으로 멀다. 정확한 숫자를 마주하니 지구 반대편 너머 아득하게 먼 곳으로 떠나왔다는 게 피부로 와 닿는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 고즈넉한 산골의 예쁜 마을에 작은 기념품과 아이스크림 가게,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정도로 작은 마을 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이 고즈넉함이 더욱 좋다. 엘찰텐에서 할 일은 피츠로이산의 조망을 즐기며 조용히 걷는 것뿐이다.
거대한 수직 암벽들이 마을 양옆을 막아서고 그 사이에 마을과 길이 이어지는 엘찰텐이 내려다보인다. 토레스델파이네 트레킹에 비하면 거의 뒷동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여행을 떠나와도 계획이 있고 일정이 생기니 매일 할 일이 있다. 이런 마을에서 일정 하나도 없이 일주일만 살면 세상의 찌든 때가 다 벗겨질 것 같다는 생각은 여행자의 선입견일 뿐일까? 내려다본 마을 풍경이 정갈해 보인다.
엘찰텐의 등산로는 걷기에 제격이다. 아주 편한 산책로다. 이 트래킹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저 너머 보이는 피츠로이 산의 연봉들이다. 1월의 남미에 도착해서 느꼈던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우수아이아를 기점으로 이곳 파타고니아에서 식는다.
계절은 여름이지만 고위도 지역이라 기온이 낮고 바람도 서늘해서 여느 가을의 정취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파타고니아에 와서는 사계절을 모두 만나고 있다. 날씨가 시시각각 변해서 트레킹에 좋은 날씨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가이드북의 걱정은 기우인 듯, 날씨는 화창하기만 하다. 여행지에서 날씨의 행운은 연일 계속된다. 여행이 체질이라는 동행들의 찬사에, 이런 여행운도 따라주는 걸 보면 나는 크눌프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트레킹 중에 사람을 많이 만난 것도 아닌데 역시 전망대는 이미 몇몇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 파타고니아까지 왔기에, 오르지는 못해도 저 아름다운 산을 바라볼 수는 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동행들과 괜히 티격태격하며 걷는 길이 즐겁다. 여행지에서 만나 동행까지 되는 사람들과는, 인간관계에 대한 욕심보다 여행 자체를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호젓한 길을 천천히 함께 걷게 되어 더 즐겁다.
이윽고 한국인들에게는 굽이치는 강이 안동 하회마을을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하회(河回)"라는 단어가 강이 굽이친다는 말이니 이곳이 바로 그 "하회"의 원형이다. 걸음을 멈추고 그림 같은 강줄기를 내려다본다. 산이 거기 있고 물이 그렇게 굽이치고 있다. 여기까지 와서 날씨 타령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일 뿐, 맑은 날이나 궂은날이나 산과 강은 거기 있을 뿐이다.
정상을 정복하기 위한 산행을 무색하게 하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작은 풀들과 나무와 지저귀는 새들과 팔랑거리는 나비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면 저 멀리 피츠로이의 만년설, 산봉우리와 빙하가 어우러진 절경이 시야에 가득 채운다.
천천히 올라가서 즐겁게 내려오는 길, 남미 지도의 작은 한 점 엘찰텐에서의 발걸음은 가볍다. 산행을 즐기고 마을로 내려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한참 수다를 떤다. 빙하의 고장이라 아이스크림도 유별나게 맛이 좋다. 편의점에서 군것질거리를 사고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를 들락날락하면서 엘찰텐 돌아본다. 여행 중의 소풍이 끝나가고 있다.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들어온 까페에서 엘찰텐에서의 고요한 하루를 마무리한다. 평화로움이 넘치는 엘찰텐의 소소한 평온함이 여행의 기운을 북돋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