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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Apr 04. 2019

나의 작은 재능에게

<나의 작은 시인에게> 여전히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헌사와 위로

*브런치 무비패스가 함께한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년지기 친구가 언젠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가 중학생이 됐을 무렵,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앉혀 놓고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꿈을 꾸는 게 얼마나 위험 일이냐'하고.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시인을 꿈꾸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재능이란 게 얼마나 간절하며 또 잔인한 것인지 어렴풋이 생각했다.  


 예술 창착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필요로 하는 세계는 없을 것이다. 노력조차도 재능이 허락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그 세계는 지극히 냉혹하기도 하다. 그래서 예술 창작인들의 재능은 언제나 범인(凡人)들에게 선망과 시기의 대상이 된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리사'라는 범인이 '지미'라는 천재를 바라보며 느끼는 경외감과 무력감을 보편적인 기존 영화 서사 기법의 범주 바깥에서 다룬 작품이다. 허무하리만큼 얕으면서도 때로는 울컥할 만큼 진중해진다. 실없이 웃고 난 뒤에는 비릿한 공허함만이 남는다.

 그러니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천재를 위한 영화가 아닌 천재를 동경하는 범인을 위한 영화다. 시인을 꿈꾸는 유치원 교사 리사는 시 창작 수업을 수강하며 끊임없이 시를 쓰고 또 그 시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 기대에 수강생들은 날 선 비판으로, 가족들은 무관심으로 화답한다. 독백 같은 무력한 삶 속에서 재능을 갈구하는 리사는 어느 날 자신의 반 아이 지미가 읊조리는 시를 듣고 단박에 그 재능을 알아차린다. 리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리사는 재능을 북돋아줄 수도 있고 그 재능을 훔칠 수도 있다. 리사는 후자를 선택한다.


리사의 고민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일반적인 영화라면 도덕적 딜레마에 일정 시간을 할애했을 테지만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에두르지 않고 시 창작 수업에서 리사가 지미의 시를 낭독하고 수강생들로부터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말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의기양양한 리사의 얼굴과 감탄한 수강생들의 얼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머러스한 정경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에 또다시 인정을 받기 위해 지미에게 시상을 던져주고 계속해서 시를 채근하는 리사의 절박함 역시 영화에서는 꽤나 유머러스하게 다뤄진다(실제로 영화는 이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 리사의 모습을 보며 '그토록 원하던 인정을 손에 넣었으니 그녀는 행복해졌나?'라고 묻는다면 '불행이 잠시 유예됐을 뿐이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극은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으며 결국 리사는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던 과거의 자신으로 복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리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미의 시로 유명 낭독회 초청을 받은 그녀가 지미에게 시를 낭독하게 하고 자신이 쓴 시가 지미의 시라고 밝힌 것은 이 연극을 끝내야 한다는 그 사실에 대한 일종의 결단인 셈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 없음에 대한 명시적 인정이 결코 쉬울 리 없다.

 평론가와 시인들로부터 호평 세례를 받는 지미를 지켜본 리사는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너무 못해서 우냐는 지미에게 리사는 "아니, 너무 잘해서"라고 대답한다. 리사는 그녀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이 눈부신 재능을 가진 아이를 보며 스스로에 대한 농도 깊은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친구 아버지의 말마따나 '재능이 없는 사람이 꿈을 꾸는 것이 위험한 일'까지는 아니어도 '스스로를 지치게 하는 일'에는 틀림없다. 이처럼 너무도 간절한 재능이 자신에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 우리는 삶에 대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하는가.


이토록 간절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재능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리사가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보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는 상투적 설정을 완벽하게 배제했다는 점에서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짐짓 새롭게 다가온다. 이미 리사는 지미가 보다 나은 환경에서 시를 창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미의 베이비시터가 해고당하게끔 부정하게 손을 쓴다거나, 지미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지미를 낭독회에 데려가는 등 자기파멸에 이르고 있었다. 지미를 향한 리사의 뒤틀린 경외심은 도덕적 한계선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져 버렸다. 이제 그녀는 철저히 혼자다.

 영화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리사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리멸렬하게 보여주면서도 정작 '리사에게 시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 질문에는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 이는 단순한 전사(前史)의 부재로 볼 수도 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뚜렷한 범주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동일시를 이끌어내는 의도된 전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어코 손에 넣을 수 없는 소망이 비단 '시'만은 아니다. 그림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나에게는)글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의미하는 바는 개인에 따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소망을 향한 비틀려버린 욕망을 정당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마냥 우스꽝스럽게 연출되기는 했지만 지미가 경찰에 리사가 자신을 납치했다고 신고하는 씬을 통해 영화는 리사의 행위가 엄연히 잘못된 것임을 공표한다. 리사에게는 애정이라고 할지라도 지미가 폭력이라 느꼈다면 그것은 엄연한 폭력이다. 결국 리사의 애정은 그녀의 시와 마찬가지로 부정당한다. 해당 씬을 통해 영화는 도덕적 균형을 맞췄지만 또 다른 문제를 배설한다. 리사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지미의 재능을 누가 북돋아줄 것인가.


정직하게 고군분투하는 당신을 위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지미의 신고로 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은 지미를 경찰차로 이동시키고 잠시 기다리라며 문을 닫는다. 공교롭게도 지미는 시상이 떠올랐다며 소리를 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다. 지미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격리돼 있다. 더군다나 경찰차는 안에서 열 수 없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일련의 미장센이 함의하듯 자인의 재능은 세상이 열어줘야만 발현될 수 있지만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까메오로 등장한 김용택 시인이 말했듯 어느덧 '사람들이 더 이상 시를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 세상이 돼 버렸으니까.

 우리는 재능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영화는 재능의 비극에서 시작해 다른 의미에서의 재능의 비극으로 끝이 난다. 그 사이에는 뒤틀리고 뒤틀려버린 리사의 집착과 욕망이 있다. 우리는 리사가 저지른 행위를 수긍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감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 비릿한 열등감과 무력함은 사실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의 끝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까닭은 우리가 그 감정들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향해 정직하게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뜻밖의 위로를 건넨다.      


PS. 나의 작은 재능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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