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산업 유산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by The Way

강화 조양방직의 빛과 시간

'조양방직, 신문리 미술관 Since 1933'. 93년 전의 방직 공장이 이제는 카페가 되었다. 평일임에도 주차장은 만차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작은 마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지붕 위에는 닭 모형이 앉아 있고, 콘크리트 회색 벽은 세월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산업 유산의 변모와 어머니 모습을 보러왔다.


나의 어머니는 1922년생이시다. 86세(1940년생) 큰 누님이 얘기했다. "어머니가 조양방직 공장에서 일하셨어. 주문도 고향 집을 떠나 강화로 건너가 일했어." 어머니는 생전에 그 시절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공장이 가동을 시작한 1937년, 어머니의 나이는 16세였다. 어린 소녀가 고향 친구와 함께 이 공장에서 일했던 것이다.

조양 방직 전경

조양방직은 강화의 지주였던 홍재묵, 홍재용 형제가 민족 자본으로 세운 곳이다. 건축 연면적만 700여 평에 달했다. 그들은 일본 나고야와 오사카에서 최신식 직조기 50대를 들여왔다. 이 공장의 성공은 강화 섬유 산업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심도직물, 평화직물, 동광직물이 차례로 들어섰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강화읍에는 60여 곳의 직물 공장이 가동되었다. 종사자만 4,000명에 육박했다. 강화에 전기와 전화가 경성방직보다 3년 앞서 처음 들어온 것도 이 조양 방직 덕분이었다.


별관 앞에서 이곳의 관리 실장을 만났다. 그녀는 2017년 현재의 이용철 대표와 이곳을 인수할 때부터 함께한 산증인이다. "처음 인수했을 때는 고물상이었습니다. 온갖 잡동사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죠."

카페 테이블이 된 직조기 자리

사장님이 인수해서 소품을 전시하고 단장해 카페를 만든 거예요." "사장님이 직접 소품을 구한 건가요?" "네 프랑스, 영국, 체코, 중국등 해외에 직접 다니면서 구해온 거예요”


인사동에서 20년 넘게 고미술품을 다뤄온 이 대표의 안목이 폐허를 설치 미술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카페 내부에는 잠수부 헬멧, 낡은 타자기, 축음기, 풍금, 옛 학용품들 그리고 유럽에서 건너온 낡은 소품들이 즐비하다. 시간의 흐름을 견뎌낸 사물들이 서로를 알아보며 배치되어 있었다.


건물 벽면에 적힌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하찮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라는 문구는 이 공간의 철학을 말하고 있었다.

방직 공장 와부와 지붕

본 건물의 지붕은 일곱 개의 톱니 형태를 띠고 있다. 면마다 창이 나 있어 별도의 조명 없이도 자연광이 쏟아진다. 전기가 부족하던 시절, 설계자는 태양의 각도를 계산해 빛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여공들은 그 빛 아래서 실의 색상을 구별하고 직물의 결을 살폈을 것이다.


천장에는 1939년 화재 후 재건할 때 설치된 목재 트러스가 볼트로 체결되어 있다. 벽체는 나무를 격자로 묶고 짚과 흙을 섞어 채운 한국 전통의 심벽 구조다. 90여 년을 목재 구조물들이 강건하게 버텼다. 바닥에는 격자형 철판이 깔려 있었다. 방직기가 놓였던 자리 그대로다.


마당에는 10여 명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철판 작업대에는 방직기 정비용 바이스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변전실 벽에는 '위험 고전압'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강화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현장이자, 조양방직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은 전기 시설물이다.


마당 한쪽에는 콘크리트 금고가 놓여 있다. 당시에는 지게로 돈을 운반해 이곳에 보관했다고 한다. 지게로 돈을 나르던 호황기, 그것이 당시 섬유산업 강화의 풍경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방직공장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피다 벽에 걸린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당시 공장의 모습이다. 사진 속에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공들이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저 옷을 입고 저 자리에서 천을 짰을 것이다.


나는 관리 실장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일했던 분들이 찾아오기도 합니까?" "가끔 할머니들이 오셔서 '내가 여기서 일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이 모시고 오기도 하고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메어 다음 질문을 이을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니도 여기서 일하셨다.


어머니는 17살에 이곳을 떠나셨고, 18살에 결혼하고 큰 딸은(큰누님) 낳았다. 나는 방직기가 놓였던 빈자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앉으셨을 법한 자리에 머물렀다. 어머니는 이 카페가 문을 열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살아 계셨다면,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그때 수고의 흔적은 건물과 함께 남았다.


출구 앞에 유일하게 남은 일본제 방직기 한 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이 귀한 유산은 노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썩어가고 있었다. 90년의 역사를 증명하는 실체가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산업 유산에는 차가운 구조물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의 숨결이 있고 기록되지 않은 많은 수고가 깃들어 있다. 나의 어머니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출구에 노출된 방직기

톱니 지붕 창을 통해 빛이 내렸다. 93년 전에도 같은 빛이 내렸을 것이다. 16세의 어머니도 이 빛 아래서 직물의 결을 살피셨을 것이다. 빛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 아래 사람의 얼굴은 바뀌었다. 기계는 멈췄고 어머니는 떠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일하던 그 자리는 산업 유산으로 남아, 자식인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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