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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굳센바위 Sep 15. 2023

무기력감과 가능성

환경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은 올바른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 관심이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환경 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가치다. 이 이익이나 가치가 행동의 방해꾼이랄 수 있는 불편이나 노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실질적인 동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익이나 가치가 단순히 환경 문제에서만 고려될 수 없다. 다른 분야와의 조화도 중요하다. 


어느 제약회사에서 컨설팅할 때가 생각난다. 폐기물 보관장에 영양제 포장 폐기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이게 뭔가요? 공장에서 나오는 폐기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많은가요?”

“포장 상태가 나빠지면 반품이 돼서 공장으로 오고요, 다시 포장해서 나갑니다.”

“포장 상태가 나빠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보세요. 비닐 코팅이 일어났죠! 이러면 손님들이 사가지 않아요.”

“왜 이런 일이 생기나요? 안 생겨야 정상 아닌가요?”

“그게, 약국에서 진열하면서 햇빛을 받거나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유통기한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공장으로 들여와서 재포장하고 다시 나가게 됩니다.”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처음에 제대로 했으면 이런 불필요한 낭비가 안 생겼을 텐데, 운송도 추가적으로 해야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환경 부하를 줄이면서 경영성과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문제의 발생가능성과 그 영향의 크기를 분석한 결과, 빈도는 높지 않았지만 환경과 사업에 미치는 영향은 개선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먼저 원인을 파악했다. 문제의 원인은 바로 비닐 코팅 그 자체였다. 해결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코팅을 왜 하나요?”

“글쎄요. 원래 늘 하던 것이라... 뭐, 제품이 고급스러워 보이잖아요.”

“안 하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는 비닐 코팅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코팅 없이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는 포장 사례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약품이나 화장품 포장에서 비닐 코팅을 하지 않거나, 아예 비닐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비닐 코팅을 하지 않으면 우선 비닐(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코팅 공정도 필요 없다. 포장재 재활용이 용이해진다. 폐기물 보관장에서 발견했던 문제도 사라진다. 

공장 책임자는 이 개선안에 감탄하면서 환경개선을 통해 원가절감도 얻을 수 있으니 본사에 보고하여 당장이라도 시행해야겠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개선안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본사 경영회의에서 마케팅 본부장의 반대로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회사들 사례도 있는데, 마케팅 차원에서 우려되면 코팅 없이 시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비닐 코팅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코팅, 이중박스 등 불필요한 포장이 많다. 이미 과대 포장된 제품을 사용하고 난 후 분리수거 열심히 하는 것은 사후 약방문과 같다. 앞에서 개선하지 못하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감을 느꼈다. 

20여 년 전, 친환경 포장 사례를 조사하던 중, 셔츠를 종이 박스만으로 포장한 상품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포장 공정이 간단하고, 소비자가 개봉하고 분리수거하는 것도 무척 쉽다. 이 셔츠는 저가 상품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러 자리에서 이 사례를 소개해오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숫한 개선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중소기업은 70% 이상의 폐기물이 발주를 주는 대기업에 의해 발생하고 있었다. 대기업의 발주 주기가 1주일 간격인데 2주일로 변경된다면 폐기물의 절반 이상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충분한 시간이 배려되지 않은 디자인 변경은 창고에 있는 제품을 버리게 만들었다. 이 역시 무기력감을 느끼게 했다. 


동시에 가능성도 보았다. 발주주기 조정과 같은 예민한 사업 프로세스를 변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어느 기업의 경영진 주도하에 발주 주기를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지켜보았다. 또한, 국내에 있는 한 외국 기업을 심사할 때도 가능성을 실감했다. 이 회사는 문제가 발생한 설비를 수리해 주는 업무 절차에서 대상 설비의 우선순위를 표시하는 전산 시스템에 안전 1위, 환경 2위, 품질 3위로 세팅되어 있었다.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안전과 관련된 설비의 수리가 항상 우선순위가 되고, 그다음이 환경이었다. 이 회사는 안전과 환경 관리 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생산 실적 또한 성장세였다. 이 결과는 생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을 넘어선 것으로, 안전과 환경 관리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생산 역시 우수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확인된 논리적 배경이 현재 전 세계 금융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ESG 개념이다. 

ESG: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거버넌스/지배구조(Governance)를 기준으로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투자 기법으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회사의 의사 결정권자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선행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의미 있는 개선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소비자로서 환경 관련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때, 무기력감을 느낀다. 

반면, 환경 문제 개선을 통해 회사, 나아가 사회의 수준이 높아져가는 사례를 발견할 때 가능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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