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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 Jan 02. 2022

닥치고 방문하라 4화

왜 기다려야 하나요? _ 이달의 닥방사 

어제까지 글을 쓰고 보니, 나는 사실 아주 어린 때부터 어떤 집의 문턱을 넘어들어가는 걸 쉬이 생각한 듯해요. 그것은 문턱 없이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살던 내 고향 마을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그 동네는 김천에서도 구비구비 아흔아흔 모랭이를 돌아 들어가야 나오는 이전부락(금릉군 494번지)이라는 곳인데, 이씨와 전씨만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고 전씨는 고작 두 집. 나머지는 모두 이씨였어요. 어려서는 그런 배경을 알리 없었고 이집 저집이 이웃인 줄로만 알았어요. 


마을 가운데 호두나무를 두고 할아버지의 연못이 있었고 그 아래로 문전옥답이 아래 읍내까지 쭉 이어졌고 거기서부터 마을은 학이 날개를 펼치듯 양쪽으로 펼쳐지면서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중심을 이루고 살고 나머지는 사촌이거나 팔촌이거나 그랬고 두 집 있던 전씨네도 모두 사돈이었다는 걸 대학생이 되어서 듣고 알았지요. 어쩐지. 무슨 행사가 있으면 온동네 잔치를 했더라는. 


그렇게 살다보니 어려서부터 남의 집 문턱을 밟고 넘어가는 것은 물론, 방문도 덥석덥석 넘어다니는 문화 속에서 동네 언니인줄로만 알고 사촌들과 어울려 지낸 까닭으로 서울살이에서도 '그런 개념'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집 옆집 아주머니들이 대문을 꼭 닫고 사는 게 참 이상스럽게 여겨졌고. 차마 그 문까지 열고 들어가고 그럴 정도는 아니었어도 얼굴을 보면 인사를 드리고 사촌지간 지내는 마음으로 지낸 것이었구나. 이제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니 공공기관이나 시설들이 문을 열어 놓고 '어서 오세요'하면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드나들고 들어가서 오랜 사촌 만나 이야기 나누듯이 주시는 음식도 덥석덥석 받아 먹고 시장 골목통에 아주머니들과도 앉으라하시기도 전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걸 잘한 듯. 


하지만 고등학교 즈음에 이르면, 닥방을 삼가한 것 같아요. 누가 나에게 닥방을 삼가해야 한다고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공부를 하느라 바빴거나 다른 재미에 푹 빠져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닥방을 하던, 남의 문턱을 훅 넘어가던 그런 사교성이 영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자라면서 예의라는 걸 지키게 되었고 그래서 훌렁훌렁 넘어다니면 안 된다는 걸 배워버렸거든요. 그럼에도 닥방을 해야 한다면, 겁이 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거나 하는 일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닥방의 자세는, 이후 아르바이트를 할 때 훌륭한 면모로 드러납니다. 닥방과 다를 바 없는 텔레마케터로 일을 할 때를 예로 들면 그래요. 뭐, 첫 대학금을 이모가 내어주어, 대학에 입학까지는 했지만, 당시 부모님의 형편이 학자금을 충분히 지원해 줄 상황은 아니어서, 나는 특차 합격 소식을 들은 날부터 알바를 했어요. 당연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가 했던 알바의 종류만 백여 개가 될 겁니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일을 했던 경험이 뭐, 지금의 나에게 나름의 자신이 되어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신사업을 경험하기도 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자신이 되어 주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이렇게 쉽게 길을 잃어요. 다시 본론으로. 그러니까 어린시절의 닥방은 문턱을 넘어 들어가 인사를 하고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대학 시절의 닥방은 종류가 다릅니다. 


이 시기는 텔레마케팅에 대해 가장 많이 배우게 되는 시깁니다. 전화로 문턱을 넘어가는 겁니다. 대면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수월합니다. 방긋 웃으며 들어가지는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처음부터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내가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면 친절하게 받아주셨어요. 이 시절에도 시작 인사는 비슷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엘지해피콜 서비스 담당직원 이현정입니다."


로 시작하는 전화. 혹시 한 번쯤 나의 전화를 받은 분이 여기에 계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전화의 메뉴얼 같은 것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 양쪽 끝에 구멍이 송송 뚫린 전산용지에 엑셀 파일로 정리된 전화번호와 상담 내용이 적힌 걸 받았던 걸로. 

그때만 해도 사회가 따뜻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화가 난 사람이 많은데, 그때는 슬픈 사람이 많았습니다. 엘지, 대우 등 대기업의 텔레마카테나 은행업무로 전화를 한 일이 많았는데. 그런 전화들은 제대로 서비시를 받았는지 확인하고 할부금을 잘 납부하시라는 안내, 할부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안내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쩌다 보면 조금 긴 상담으로 이어지는 날도 종종 있고는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화 중에 하나는, 하나은행 근무 당시에 전화통화를 한 모 영화잡지사 대표님이었어요. 종종 자주 연체를 하셨는데, 전화를 하면 이제 스물한살인, 얼굴도 본 적 없는 나에게 참 길게도 어려운 사정을 설명해 주시고는 하셨어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꾹꾹 찍어내고는 했어요. 긴 하소연 끝에는 그래도 "곧 입급할게요.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하시고는 약속을 지켜 주셨던 게 기억이 나요. 은행의 카드론은 또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보니, 회계사나 의사, 변호사 같은 분들이 많았는데, 나는 그런 분들도 제법 대출을 받으신다는 사실과 연체를 하신다는 사실에 놀라며 통화를 하고는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때, '사'자 돌림이라고 모두 부자가 아니며 연체 독촉 전화를 불편해 한다는 사실, 전화 건너편 목소리가 이쁘면 시간을 내서 얼굴을 꼭 확인하러 온다는 특징을 파악했어요. ^^ 나의 사적 경험이지만 정말 열의 한 명은 일부러 지점에 들려, 전화를 건 나를 찾아와 음료수를 사주고 가셨다는. 여기서 나는 이뻤던 걸까요? 상냥했던 걸까요? 그래서 하나은행 근무 당시에 이남용 부지점장님은 내게 아주 은행에 남아 일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해주셨지요. 그때 IMF가 터져서 하나은행이 보람은행을 합병하며 전쟁통 같은 것을 겪고 수없이 많은 가정이 부도로 압류를 당하고 그 일들을 수행하는 은행원들이 곤죽이 되어 의자에 푹푹 쓰러지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은행 업무가 재미나서 계속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전쟁통을 지켜 보면서 옆자리 대리님의 와이셔츠가 뜯겨 나간 것을 보고서는, 너무 슬퍼서 은행에는 다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은행원이랑 결혼을 했는데, 그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낸 은행들의 이후 모습은 딱히 그렇게 험한 것은 아니었다는. 그래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나 봐요. 결국에 나는 은행원이 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때를 만나 은행에 일할 기회를 손사래치며 거부했던. 경단이 되었을 때는 좀 후회했어요. 아, 출판이 아니라 은행을 택했어야 했어. 하지만.... 나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을 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문턱을 넘어 들어가야 하는 닥방도 있지만 이렇게 유선상의 닥방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유선은 이제 무선! 랜선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이제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런 닥방 정신으로 전 세계와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것! 생각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말이에요. 자, 닥방사를 통해 시대의 변화까지 챙겨 보았는데. 다음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정말 궁금하지 않나요? 라이킷과 댓글로 응원 가득 주시면 열심히 쏟아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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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원님, 장영순, Junghye Hwang, 외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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