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맞는 곳에서 꼭 맞는 쓰임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기대가 착각일 수 있음을 깨닫고 슬픈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역에 내리니 새벽 1시가 다 되었고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 막차 시간은 이미 지났던 터라 30분 정도 돌아가는 버스를 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어떤 여성분이 내게 다가왔다.
“어디 사세요?”라고 물으셨다.
예전 같으면 밤늦은 시각 여성은 경계하지 않았지만, 정유정 사건이 있고 난 뒤론 여성도 내게 경계 대상이다. 그런데 무해해 보이는 인상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OO 마을에 살아요”라고 말하게 됐다. 그러자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자신도 그곳에 사는데, 택시를 혼자 타는 게 너무 무섭다고 본인이 돈을 낼 테니 같이 타자고 하셨다.
당황스러운 전개였지만 늦은 시각 혼자 택시 타는 걸 무서워하는 상황을 이해하기에 이분을 따라갔다. 어디서 택시를 잡아야 하나 우왕좌왕하는 사이 내가 타려던 버스가 왔고, 굳이 택시를 얻어 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길을 안내해드릴 테니 함께 버스를 타고 가자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빈 버스 안 우리는 두 자리씩을 차지하고 양옆에 앉았다. 이분께서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역에 있는 김밥천국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 첫차를 타실 계획이었는데 나를 만나 너무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곤 내가 여쭤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이 시간에 있게 된 이야기를 봇물 터지듯이 시작하셨다.
저녁 7시 반쯤에 집에서 나와 성신여대로 향하셨다고 했다. 성신여대는 우리 집에서 1시간 40분 이상 걸리는 꽤 먼 곳이다. 성신여대에 간 이유는 ‘잘 뽑혀서’라고 하셨다. 다른 곳에서는 안 뽑히는 인형이 그곳에선 유독 잘 뽑혀서 ‘인형 뽑기 성지’라고 말씀해주셨다. 그제야 이분이 매고 있는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쇼핑백 가득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손맛을 끊을 수가 없었고, 계속하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다고 하셨다. 모범생처럼 수수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분이었는데 의외의 취미를 가지고 계셔서 놀랐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인형을 뒤적이시며 내게 작은 키링을 건네셨다. 거듭 사양했지만, 이것도 인연인데 받아달라고 하셨다. 자기 집엔 이미 인형이 한가득 있고 당근마켓에 내놔도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키링보다 더 큰 맹구 인형 하나를 더 주셨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버스 종점에 도착했고 2분 정도 마음 졸이며 걸어야 하는 어두운 골목을 함께 걸었다. 혼자였다면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긴장한 채 걸어야 하는 길이었는데 이분과 도란도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건너와서 나도 좋았다. 곧 아파트 단지가 보였고 길을 안내해드렸다. 덕분에 집에 무사히 왔다고 내게 거듭 인사하셨고, 나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며 헤어졌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누군가를 무사히 집에 보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렇게 혼자 걸어오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을 자각하게 됐다. 발목을 접질려서 구두 버클은 떨어져 있었고, 덜렁덜렁한 신발을 신고 코흘리개 맹구 인형을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는데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오랜 기대가 무너졌기에 기분이 바닥이어야 하는 내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인생은 참 재미있구나, 신은 나를 망가지게 두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선배를 만났다. 이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맹구 인형이 필요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선배는 그러면 자신의 둘째 딸에게 달라고 하셨다. 인형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면서. 이 얘기를 듣는데 너무 기뻤다. 맹구 인형을 사랑해줄 사람을 드디어 찾았다!
어린이날 선물이 될 수 있을까 싶어 회사 근처 카페에서 선배에게 인형을 전해드렸다. 선배가 딸에게 인형 사진을 보내니 곧바로 “기분 좋아. 이모 고마워요!”라는 답변이 왔다.
맹구 인형이 꼭 맞는 곳에 가게 되어서, 꼭 맞는 쓰임을 찾아서 다행이다. 잠시 맹구 인형의 여정을 떠올려보았다. 어느 먼 나라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찍어내듯 만들어져, 손에 손을 거쳐 성신여대 인형 뽑기 기계 안에 들어가, 누군가에게 구출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가 어떤 사람에 의해 드디어 세상에 나왔는데, 하필이면 인형에는 도통 관심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우연히 전해졌고, 그렇게 별 의미 없이 먼지만 켜켜이 쌓여갈 수 있겠다고 절망하던 차, 드디어 자신을 사랑해줄(어쩌면 성장기 내내 애정해줄) 한 소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맹구 인형의 감격스러운 여정을 생각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 진로를 찾지 못해 좌절해 있던 내게 어느 날 아빠가 프린트해서 건네주신 글귀가 떠올랐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름난 꽃도 풀숲에서 피어나면 잡초가 되고, 잡초도 꼭 알맞은 곳에서 피어나면 특별한 꽃이 된다”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빠에게 받은 의외의 선물이었고 당시 내게 꼭 필요한 말이어서 거의 10년간 이 글귀를 옷장 앞에 붙여놓았다. 가끔 옷장을 열 때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게 맞는 쓰임은 무엇일지 생각했었다.
‘사람도 물건도 각자에게 꼭 맞는 쓰임이 있으니, 무언가 부족하다고 깊이 좌절하진 말자’는 이야기를 맹구 인형이 들려주는 거 같았다.
맹구 인형과 함께 받았던 키링 역시 꼭 맞게 쓰이고 있다. 키링이 유행하기에 나도 갖고 싶었는데 굳이 사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게 첫 번째 키링이 이렇게나 우연히 생긴 것이다. 올해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진 수업 카메라 가방에 이 키링을 달았다. 그리고 카메라 가방을 즐겁게 흔들며 틈나는 대로 사진을 찍고 있다.
키링을 볼 때면 ‘오늘 하루도 뜻밖의 기분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니 즐겁게 살자’는 마음가짐이 저절로 생긴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전해준 인형이 내게 선물해준 의미다. 인생은 이렇게나 흥미진진하고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