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미국 산호세 유학생의 일기장

프롤로그

by 시상

"육포를 마음껏 사 먹고 싶다"


미국 대학원 시절, 내가 일기장에 써 놓은 문장이다. 일기장에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되는 건 없는 스물세 살 소녀의 답답한 마음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실리콘벨리에 이렇게 회사가 많은데, 왜 나에게는 기회가 없는 걸까. 과연 나는 데이터 과학자가 될 수 있긴 한 걸까."

"아직도 미국 친구들이 자주 하는 'What's up?'이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다. 언제쯤 나는 이 나라 언어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수 있을까.'

"육포를 마음껏 사 먹고 싶다. 월세 600달러를 내고 남은 400달러로 생활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 일기들을 읽다 보니, 그때의 내가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7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그 소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맞아. 네가 그렇게 꿈을 꾸어 준 덕분에 지금 나는 네가 바라던 일을 하고 있어. 이제는 네가 사고 싶었던 것들을 스스로 살 수 있고, 가고 싶었던 곳에도 갈 수 있게 되었어. 좋았던 시간만큼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시간들도 많았을 텐데, 묵묵히 버텨줘서 고마워. 안타깝게도 앞으로 헤처 나가야 할 일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고, 언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몰라 가끔은 나도 움츠려들 때가 있어.


그래도 괜찮아.


네가 시간을 꾹꾹 눌러 담아 걸어온 그 빼곡한 기억들 덕분에, 나는 이제 예전보다 덜 외롭거든."


한국에서 대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각종 컨퍼런스랑 테크 회사에서 주최하는 소셜 모임에 참석해 네트워킹도 해보고,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든 어필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이비리그 학생들을 포함한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단 하나의 인턴십 자리를 두고 경쟁하기에는, 나는 그리 뛰어난 사람도, 운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미국 친구들에게 오해를 사기도 했고, 진지한 만남을 기대하고 나갔던 첫 데이트 자리에서 사실은 그저 나와 한 번 자보려고 나온 남자들을 만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걸어온 20대는 사계절과 참 많이 닮아 있다. 뜨거운 여름처럼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던 순간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차가운 바람에 감기에 걸리듯 마음이 시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계절이 지나가고 나니, 어느 순간 꽃봉오리가 맺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보려고 한다. 내 계절이 누군가에게 어떤 공감으로 닿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작은 위로가 되고, 잠시 웃음을 짓게 하며,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여운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