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H가 얼마 전 미국 우리집에 방문했다. 그녀의 옆에는 남편도 함께였다.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LA를 방문한 것이었다. H는 내가 미국에서 유학을 시작했던 그 옛날부터 "언젠가는 인희가 있는 미국에 꼭 놀러가겠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 약속을 한지 어언 16년이 흘렀고, H는 기어코 약속을 지켜냈다.
금요일 퇴근 후 H와 그녀의 남편을 픽업하기 위해 부랴부랴 LA 한인타운을 향했다. H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이라니, 아무래도 현실감이 없었다. H는 화요일에 미국에 도착해 곧바로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가서 2박3일을 보내고 다시 LA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인타운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내 차에 태운 뒤 우리는 곧장 '명동칼국수' 식당으로 갔다. 굳이 외국까지 나와서 한국 음식을 먹기 싫다던 H는 식당에서 내어준 김치 맛을 보더니, 평정심을 잃고 만두와 칼국수를 알차게 먹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역시 여행 끝에는 무조건 한식이지!
H의 남편은 조용하고 착한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딱 봐도 H와 오손도손 잘 살아갈 것 같았다. 이번에 그녀의 남편을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착한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결혼 후 H가 크게 마음 고생을 안하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H는 우리 초등학교 친구 모임 4명 중 가장 마지막으로 결혼을 하는 것으로 그녀는 혼인신고부터 먼저 하고 신혼여행을 왔다. 진짜 결혼식은 올해 연말 내 생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내 생일이 결혼식이라니,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녀의 결혼기념일. 따지고 보면 나도 그녀의 생일 바로 다음날에 결혼식을 했어서, 그녀의 생일은 늘 나의 결혼기념일과 함께 한 세트처럼 따라다닌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한 다음에야 나의 결혼기념일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평생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어지는 대목.
H와 나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녀는 우리 엄마가 당시 운영하던 영어 공부방 학생이었다. 그녀는 날마다 우리집에 와서 나와 함께 엄마에게 영어를 배우고, 수업이 끝나면 나와 함께 놀이터로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놀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우리는 더욱 친해졌고, 중학교 내내 붙어다녔다.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곳에 진학했지만, 우리는 수시로 만나 인연을 이어나갔다.
H는 이 세상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부모님 제외) 내 인생의 모든 역사를 곁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다. 그녀는 나의 흑역사를 모조리 알고 있는데, 과거 내 남편을 소개시켜주는 자리에서 H는 나의 흑역사 에피소드들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았다. 당시 남편은 왜 네 친구가 너의 치부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지만, 나는 "재밌어서 그렇지!"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H가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는 1도 없었다는걸 너무도 잘 알아서 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과거 이야기를 노닥거리는게 그저 재미난 놀이였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H는 내게 아주 막역한 친구다.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걸 가장 잘 알 수 있는건 H에게 부탁한 짐에서 드러난다. 미국에 오는 H에게 내 물건 좀 가져와 달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쿠팡에서 한 개 두 개 사서 보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양이 엄청나졌나 보다. H는 무려 캐리어 한 개를 나의 짐을 넣는 용도로 사용했다. H가 건넨 캐리어를 열었더니, 그 안에 내 물건이 빼곡하게 차있었다. 남편은 신혼여행에 온 친구에게 무슨 민폐냐며, 혀를 내둘렀다. 아, 이렇게 많았던가? 나도 미안함에 머쓱해졌다.
나는 본래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부탁이라는 걸 못하는 사람이다. 부탁을 할 바에는 나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라고 해야할까. 내가 부탁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건 정말 엄마, 아빠, 남편. 세상에서 이 세 사람이 전부다. 그런데 H에게 이만큼의 엄청난 짐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26년 알아온 세월의 짬밥을 무시할 수 없는 거다. 26년간 친구였던 그녀에게는 가족만큼이나 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H는 우리집에서 3박4일을 보낸 후 멕시코 로스카보스로 떠났다. 일을 하는 나를 배려해서 딱 금, 토, 일 주말 동안에만 머물다 월요일 새벽에 훌쩍 떠난 것이다. H와 그녀의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너무도 많았다. 무려 살면서 처음 LA에 방문한 것이니 LA의 이곳저곳을 모조리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어쩌면 내가 짜놓은 빽빽한 스케줄이 그들에게는 무리가 아니였을까,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본다.
아울렛, 옥스나드 비치, 웨스트레이크 빌리지, 게티센터, UCLA, 베벌리힐스, 더그로브 쇼핑몰, 다운타운, 시청까지... 우리가 토요일과 일요일 단 이틀 동안 방문한 곳이다. 시간의 한계로 한 곳에서 진득하게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스케줄을 소화하는 연예인처럼 바쁘게 돌아다녔다. H는 애초부터 나를 믿고, LA에서 어떻게 여행할지에 대해 계획 조차 짜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여행 계획을 짜는데 있어서만큼은 파워 J 성격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한 여행 일정을 짜는 일은 즐거웠다.
이틀 동안 LA 나들이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이 차려준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남편은 손님이 우리집에 오면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이어서 나보다도 더 내 친구에게 잘했다. 평생 잊지 못할 주말을 함께 보내고 H는 월요일 새벽 6시, 우버를 타고 남편과 함께 공항으로 떠났다. 이제 신혼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로스카보스에 가서 올인클루시브 호텔을 만끽할 차례였다.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신혼여행과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그녀의 신혼생활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그녀와 작별 인사를 했다.
12월 결혼식에서 만나, 친구야.
그녀의 앞날에 꽃밭이 깔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