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 New York, USA
샤를로테 루카스의 <당신의 완벽한 1년 Your Perfect Year>이라는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은 무슨 일이든 늘 하던 방식이 아닌 정반대의 방식으로 해봐.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해 봐. '변화'는 '다르게 해 보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법이니까. 그렇게 해야만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어... 네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너를 둘러싼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느껴봐. 그럼 오늘도 재밌는 시간을 보내길 바라!"
뉴욕을 찾을 때마다 매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도시를 새롭게 느끼는 경험을 한다. 친구들과 브라이덜 파티를 하러 찾은 뉴욕과, 출장으로 예술대학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갔던 뉴욕은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전시 준비를 위해 갤러리 호핑 Gallery hopping을 하러 간 뉴욕도, 레이오버 차 잠시 들러 여행한 뉴욕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세계에서 온 문화가 쥐어 짜여 춤추고, 싸우면서 서로 합병되는 자그마한 섬'이 뉴욕이라 했던가. 뉴욕에 가면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전혀 새로운 공간에서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사고 싶어 진다. 낯선 곳에 뚝 떨어진 느낌이 들어 당황스럽다가도 이내 이곳에 익숙한 듯 낯선 길을 걷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포가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일까. 이 도시에 방문할 때마다 나는 색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렌다.
뉴욕에 가면 반드시 두어 개의 공연을 보고 온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뿐 아니라 오프 브로드웨이 off-broadway공연과 이스트 빌리지 East Village의 오프오프 브로드웨이 off-off-broadway공연도 보는데, 규모에 관계없이 좋은 공연은 인생의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법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대중성에 초점을 맞춘 크고 화려한 공연이라면, 오프 브로드웨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도전적이고 새로운 실험이 이뤄지는 곳이라 흥미롭다.
슬립 노 모어 Sleep no more가 그런 공연 중 하나인데, 무대도 좌석도 없는 공간에서 관객이 극 안으로 들어가 배우와 교감하면서 스토리를 체험하는 이머시브 immersive 연극*이다. 초연당시 극장체험의 룰을 파괴한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주목받으며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 Drama Desk Awards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Macbeth를 원작으로 하는데, 공연 제목도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라며 자책하며 절규하는 대목에서 따왔다. 전체적인 무대 배경은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조셉 히치콕 Alfred Joseph Hitchcock감독의 필름 누아르에서 영감을 받았다.
대단히 추웠던 겨울밤, 살을 에는듯한 바람을 뚫고 첼시의 맥키트릭 Mckittrick 호텔에 도착했다. 이미 예매한 티켓이 아니었다면 호텔방에 눌러앉아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을 그런 날이었다. 툴툴거리며 꽤나 긴 입장 절차를 거쳐 들어가자마자 나는 공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와 엄청난 디테일에 금세 압도당해 버렸다. 어두침침한 조명과 스산한 음악, 신비로운 향과 괴기한 소품으로 꾸며진 공간은 오싹하고도 우아했다.
공연의 시작과 함께 등골이 서늘해지는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었다. 연극은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고, 배우들은 여섯 개 층에 걸쳐있는 100여 개의 방을 오르락내리락 돌아다니며 연기를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관람하는 게 맞나?' 잠시 주춤했다. 남들은 어쩌고 있나 주위 눈치를 살폈는데,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당황스럽지만 짜릿했다.
일단 가장 많은 관객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 맥베스 뒤를 쫓아다녔다. 잠든 덩컨 Duncan왕의 얼굴을 베개로 짓눌러 살해하는 맥베스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다가, 또 다른 방에서 맥베스가 그의 아내와 함께 욕조에서 피를 씻으며 괴로움을 표현하는 장면을 숨죽여 바라봤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하루하루 종종걸음으로 소리 없이 다가가고, 지나간 날들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티끌의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추어 왔구나.
꺼져라, 꺼져, 덧없는 촛불아!
인생이란 기껏해야 걸어 다니는 그림자.
잠시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뽐내고 안달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영영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배우, 그건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소리와 노여움에 가득 찼지만 뜻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림자처럼 배우를 따라 뛰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극 안에, 장면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장면 사이의 퍼즐을 맞추며 꽤 여러 배우를 따라다녔다. 공간 구석구석을 관찰하다 잠시 길을 잃기도 하고, 소름 끼치게 연기를 잘 한단 생각이 든 장면은 여러 번 보기도 했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또 다른 울림을 불러왔다. 대사 한 줄 없는 공연인데 배우들의 연기와 에너지로만 세 시간을 박진감 넘치게 끌어가다니 실로 대단했다.
공연 내내 서서, 아니 뛰면서 봐야 하는 체력전을 요하는 공연인데 끝나자마자 내일 다시 관람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배우를 따라다녔던 관객은 어떤 경험을 했을까? 너무 궁금했다. 고등학교 영문학 시간에 고어로 멱살 잡혀 끌려가듯 어렵게 읽은 맥베스였다.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 했던 그 책을 좀 더 촘촘히 읽고 싶어졌다. 아, 그래서 이 공연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는 거구나.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친구와 각자 본 내용을 쉴 새 없이 얘기했다. 분명 같은 연극을 봤는데, 전혀 다른 연극을 본 듯했다. 호텔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도 장면의 조각들이 떠올라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 맥베스가 잠을 죽였다. 나의 죄없는 잠을. 아, Sleep No More라는 제목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구나!
*이머시브 시어터: 이머시브(Immersive)는 액체에 무언가를 담그거나 몰두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했다. 그래서 이머시브 시어터를 우리말로는 ‘관객 몰입형 공연’이라 부른다. 관객을 창작 과정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때문에 즉흥성이 강해 그때그때 공연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무대는 공연장일 때도 있고 생활공간일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