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ndaleena Jan 18. 2020

엘 뻬뇰의 마을 구아타페에 가다

후안 말대로 메데인, 메데인을 대표하는 풍경의 탄생


안개에 갇힌 공룡알?



“너네 오늘 구아타페 간다며?”

“갈 건데, 조금 있다가.”

“오후에는 버스 없으니까 서둘러야 돼.”


후안은 아침 일찍부터 우리를 재촉했다. 며칠 전부터 구아타페에 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댄 탓이었다. 하지만 융통성이 있다 못해 흘러 넘치는 우리에게 계획이라는 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꼭 맞춰 따르다가도 어떨 때는 공들여 세운 계획표를 가차없이 지워버리기도 했다. 이날도 그랬다. 왠지 늘어져 하루를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었다.


한참을 미적거리다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늦었지만 구아타페를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시내 구경이라도 나가야 하는 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토독 토독. 

때마침 모든 고민을 해결할 빗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종일 누워 있으라는 하늘의 신호였다. 잠깐 내리다 금방 멎을 것 같던 비는 저녁이 되자 폭우로 바뀌었고, 다음날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구아타페에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릴 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걱정은 커져만 갔다.



“너네 오늘은 구아타페 갈 거지?”

“비 오는데 갈 수 있을까?”

“이 정도 비에는 괜찮을 거야.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믿어 의심치 않는 빠드레, 후안의 한 마디에 호스텔을 나섰다.


구아타페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마을 근처에 있다는 거대 바위 ‘엘 뻬뇰’을 보기 위해서였다. 무려 칠천만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바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의 신비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계단을 칠백 개나 올라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는 크기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처음 마주한 엘 뻬뇰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도,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라 하기에도 어딘가 이상하고 어색한 모습이었다. 안개에 둘러싸여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것은 이제 막 땅에 내려앉은 커다란 공룡 알 같았다.



우비를 뒤집어 쓰고 엘 뻬뇰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상상만으로도 벅찼던 칠백 개의 계단은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중간중간 25개 단위로 표시된 계단 수를 하나씩 세면서 오르니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별거 아니네!”



정상은 여느 전망대가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념품이나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 앞은 무언가를 사달라며 떼를 쓰는 아이들과,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며 목을 축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엘 뻬뇰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콜롬비아에서는 제일이라던데, 아니나 다를까 난간 주변은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공호수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원래는 마을뿐이던 이곳에 인공호수가 자리한 이유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정부가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댐을 건설하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공호수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호수는 바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컸고 마을은 마치 바다 위에 펼쳐진 섬처럼 보였다. 


엘 뻬뇰이 메데인의 주요 관광 자원이 되면서, 인접 지역 주민들은 엘 뻬뇰의 소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갈등이 심해지면서 구아타페 마을 주민들이 엘 뻬뇰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벽면에 ‘GUATAPE’라는, 자신의 마을 이름을 새기려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곧바로 엘 뻬뇰 주민들에 의해 저지되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칠천만 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엘 빼뇰은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며 우뚝 솟아있었지만, 그 주변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변해갔다. 없던 호수가 생겼고, 몸에는 ‘G’와 ‘U’를 쓰려다 멈춘 ‘l’라는 글자가 남았다. 참 많이도 바뀌었다.





동화될 수 없던 동화의 마을


엘 뻬뇰에서 구아타페까지는 걸어가기에도 무리가 없지만, 점점 굵어져 가는 빗줄기에 우리는 ‘툭툭’ 하나를 잡아 탔다. 툭툭은 엘 뻬뇰과 구아타페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이동 수단으로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것이다. 작고 동글동글한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운전사와 손님 세 명이 탈 수 있을 정도로 꽤 널찍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로 된 창문을 열고 달리니 빗물이 들어오는 게 조금 시원했다. 운전기사는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우리에게 구아타페 터미널 근처, 자신의 동생이 운영하는 식당을 추천했다. 메데인에서 먹은 음식 중 무엇이 가장 맛있었냐는 질문에 ‘반데 아 빠이사’라 답하자, 동생 식당의 반데 아 빠이사가 “무이 부에노”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툭툭이 위잉 소리를 내며 달린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이내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운전기사의 말과는 달리 식당의 반데 아 빠이사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끝내고 구아타페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아타페는 동화 속 마을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구아타페 주민들은 엘 빼뇰을 찾는 관광객들을 마을로 끌어 들일 적절한 볼거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 동화 같은 마을은 만들어졌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벽, 꽃과 나비가 그려진 건물이 거리를 가득 메운 풍경에 관광객들은 걸음을 멈추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상인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뒤엉킨 골목은 정신없이 복잡했다. 


무리에서 잠시 벗어나 마을 한켠의 구석진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오르막길은 이제까지 보았던 알록달록한 동화 마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색이 누렇게 바래고 반쯤 허물어진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에 위화감이 들었다. 


원색의 생기와 화려함으로 채워진 공간 뒤, 무채색의 뒷골목에 흐르는 건 고요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호스텔에 가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