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반복, 설이 추석으로 바뀌었을 뿐
회사가 생사의 기로에 섰다.
-3억, 2 달 뒤 예상되는 우리 회사의 현금 잔고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곳은, 리더들이 모인 정기 회의였다. 사업부 별, 주요 팀별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재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죄송합니다"라는 단어는 처음에 크게 심각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도 나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2019년 2월 설이 막 지나고 나서 지금과 같은 심정으로 나는 브런치에 내가 공동 창업한 회사의 구조조정에 대한 글을 작성했다. 내 머릿속에 그때의 아픔도, 각오도 모두 잊힌 상태로 있다가 2023년 설이 추석으로 바뀌었을 뿐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의 글을 쓰기 위해 브런치에 다시 찾았을 때 그 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2019년 글을 발견하기 전에 원래 쓰려고 했던 이 글의 제목은 '산수를 못하면 회사가 망한다.'였다. 왜냐면 너무나도 쉬운 뺄셈과 곱셈의 실패로 현금 흐름 예측에 실패했고 우리 회사가 생사의 기로에 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글을 발견하고 나서 나는 지금 사태의 본질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2019년 설이 지나고, 2023년 추석이 지나고 발견한 두 회사의 위기 모두 '믿음'으로 생겨난 일이었다.
믿음은 너무나도 무섭다. 안될 것도 되게 만들고, 될 것도 안되게 만들 수 있다. 두 스타트업의 표면적인 재정 문제를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믿음이었다. 동료에 대한 믿음, 사업에 대한 믿음, 그리고 막연한 희망적 미래에 대한 믿음, 이 믿음들은 불안감을 잠재우는 마약이었으며, 그 마약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고 간단한 산수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무서운 믿음의 힘은 안타깝게도 현실을 바꿀 순 없다. 1 - 2를 3으로 만들 수 없다. 1 - 2는 -1이다.
당시에는 막연하게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믿음으로 생겼던 일이라면, 지금은 저 사람이라면 뭔가 계획이 있겠지 또는 우리라면 '어떻게든 하겠지'라는 믿음에서 생겨났다. 그렇기에 조금 이상해도, 불안감이 들더라도 넘어갈 수 있었다. 이야기를 꺼내다가도 다시 넣게 되었다. 믿기 때문이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편했다.
2019년 구조조정 이후 4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나에게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러 회사를 거치며 나는 개발자에서 PO로 변해있었다. 사업을 논하고, 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저렇게 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부족했고 무엇도 몰랐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무엇보다도 내 동료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성공을 믿었다. 성공한 그들의 모습은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할 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래서 안심했다. 우리라면, 정확히는 그들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의 증조가 명확함에도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내가 할 것만 잘 해내면 되겠지'라고 안도하고 있었다.
2019년에도 나는 '내가 할 것만 잘 해내면 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 조금 다르다면 내 일과 주변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다. 그땐 내가 주력한 개발 외의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능력 있는 그들이 무언가 플랜을 세웠을 것이고 나는 거기에 따라가면 된다 '내가 할 것만 잘 해내면 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공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편하게 가고도 싶었다. 내심 2019년 갓 대학을 졸업한 대표와 다르게 지금의 우리 회사 리더들이라면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1 - 2 = -1의 위기 신호들을 보고도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고작 명절 연휴 하나 차이로 이런 분위기 차이를 만들게 된 것이다. 2019년에는 재무적 위기를 아예 보지 않다 생겨난 일이라면, 지금은 매주 신호를 보았음에도 생겨난 일이란 점에서 더 문제라 할 수도 있다.
더 이상 믿음이라는 색안경으로도 붉은 위험 신호를 가릴 수 없을 때, 마치 그곳에 없었던 신호가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믿음은 없어지고 붉은 위험 신호가 우리 모두에게 보였다.
믿음의 색안경을 벗는데 사람마다 시간차가 있었다. 누구는 일찍이, 나는 그 회의가 끝나고 나서 '구조조정 리스트'를 논의할 때 색안경을 벗을 수 있었다. 늦게서야 색안경을 벗게 된 나는 처음에는 부정했으며, 사태의 심각성에 여러 감정이 일어났다.
감정은 다양했다. 믿음이 있었기에 배신감이 있었을 것이고, 분노가 있었다. 그 감정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빠르게 슬픔으로 이어졌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과 과거에 대한 후회로 이어졌다. 나의 감정은 '아니 도대체 왜? 무슨 생각이었지?"라는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궁금했다. 이렇게 되다니, 무언가 생각이 있던 게 아닌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내가 믿었던 사람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우리에 대한, 그리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색안경을 벗고 현실을 깨닫고 나서 일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믿었던 그들이 판단하자마자 정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겪었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긴박하며 숨이 막혔다. 성공을 이뤄낸 이들의 저력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도 보였다. 나는 처음에 따라가지 못했다. 감정에 짓눌렸다. 따라가는데 하루 정도 시간이 걸렸다. 늦게 따라가며, 먼저 일을 처리하며 달려가는 그들이 처음에는 무심하다 생각했다. 그들도 나와 같았으리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갔다. 나도 늦었지만 뛰기 시작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간단하다. 1 - 2를 놓고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다. 1을 10으로 만들기, 2를 0.1로 만들기, 그리고 당연히 둘 다 해야 한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1을 10으로 만드는 건 당장에 이뤄낼 수 없다.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더 일찍 색안경을 벗었다면, 얼핏 얼핏 느껴지던 그 불안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면 충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당연한 수순으로 2를 줄이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사람들이 모여하는 일이기에 사람에게 먼저 펜이 닿는다. 그리고 사람을 보기에 앞서 숫자를 먼저 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쓰는 금액의 50% 미만, 거의 40%로 줄여야 했다. 그래야 최소한의 시간을 얻고 그 시간으로 1을 10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할 수 있다.
도망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