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로(Aggro) 공식

내가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것들

by 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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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의 방패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이 울부짖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이 방패를 긁는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방패 사이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닿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탱커의 뒤에선 마법사가 화려한 불꽃을 쏘아 올리고, 궁수가 눈을 노리며 화살을 날리지만, 괴물의 시선은 오직 탱커에게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때, 힐러의 치유의 빛이 탱커에서 쏟아지자, 괴물의 시선이 탱커에게서 힐러로 전환됩니다.

"왜! 나를 노려보는 거죠!"

파티에서 가장 약하고, 직접적인 공격에 참여하지도 않은 힐러가 억울함 가득한 비명을 지르지만,

이것은 결코 불운이 아닙니다.

모두 냉철한 계산에서 내린 ‘어그로(Aggro)’ 공식의 작동 결과이죠.

왜냐하면 ‘어그로(Aggro)’는

공격은 강한 자가 아니라 위협한 자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어그로의 공식은

흔히들 이런 오해를 불러오곤 합니다.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거나, 조직의 모든 책임이 나에게 쏠릴 때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서, 혹은 너무 약해서 타깃이 되었다고 말이죠.

하지만 세계의 규칙은 조금 다릅니다.

당신이 지금 전장의 중심에 서 있는 이유는 당신의 성격이나 본질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쌓아온 '누적 위협치(Threat Value)’ 때문입니다.


Target = Max(Threat[A], Threat[B], Threat[C])
위협도가 가장 높은 대상 선택

게임 속 NPC가 대상을 선택하는 로직은 단순합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전사의 도발처럼 적의 규칙을 무시하며 시야를 나에게 돌리거나

마법사의 공격처럼 큰 피해를 주었거나(공격)

힐러의 회복처럼 전투의 흐름에 변화를 주었을 때

위협 수치는 급격히 상승합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죠.

회의실에서 가장 먼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

남들이 침묵할 때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

누구보다 성실하게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 애쓰는 사람

의도치 않게 거대한 위협치를 쌓게 됩니다.


내 안의 세 결(結)이 조용히 말을 건넸습니다

전사가 칼을 쥐며 말했습니다.

"어그로는 능력이 아니야. 반응의 누적이야.

먼저 말하고, 먼저 행동하고, 먼저 도우면, 위협도가 쌓여. 그럼 공격받아."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며 말했습니다.

"시스템은 누가 강한지 안 봐.

누가 많이 움직였는지 봐. 힐러가 공격받는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라, 가장 많이 반응했으니까."

치유사가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발(Taunt)이 있어.

위협을 의도적으로 끌어당기는 스킬. 탱커는 자발적으로 어그로를 쌓아. 희생이 아니라 선택이야."


저는 늘 먼저 공격받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왜 항상 나만 피곤한 일에 휘말릴까?"라는 의문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말을 안 하는'선택을 해보기도 했지만, 스스로 부당하거나 생각하거나,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나도 모르게 스스로 먼저 반응하고 나서게 되더군요.


누군가의 부탁이 즉각 응답하고,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 수습하고, 구조화하며 내 역할을 확장하는 것이 성장이라 생각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나댄다는'평가뿐이었습니다.


'가장 반응성 높은 타깃'으로 인식된 시스템은 저를 강철 같은 멘털의 '탱커'로 오해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공격은 상처가 되어 이런 저를 이해하고 함께할 조직이나 회사를 찾아 도망쳤습니다.


사실은 제가 쌓아 올린 위협 수치가 파티의 다른 누구보다 높았기에 모든 책임과 오해의 화살이 저를 향해 날아왔던 것인데...그때의 저는 어그로를 감당한 그릇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그로의 관계는 중력과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 끼친 영향력이 클수록,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의 무게도 무거워집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관계의 무게에 짓눌려 소모되고 있다면, 잠시 ‘위협 감소(Threat Reduction)’ 설계를 고민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1. 행동 빈도 줄이기

2. 물리적, 심리적 거리두기

3. 의도적 침묵하기

로 위협도 수치를 초기화 해 보는 것이죠.


이것은 회피가 아닌 위협도 관리이고요.


도발은 선택입니다

반대로 자발적으로 위협을 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도발(Taunt):

동료의 실수를 덮어주기 위해 비난을 자처하거나

조직의 위기 앞에서 기꺼이 화살받이가 되는

적극적 희생을 선택

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파티 전체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전략입니다.


내 안의 세 결(結)이 다시 말했습니다

전사가 검을 들었습니다.

"위협도 체크해. 네가 너무 많이 반응하면, 모든 공격이 너한테 와. 때론 침묵도 설계야."

마법사가 계산했습니다.

"거리 조절해. 시야에서 벗어나면 위협 계산 안 돼. 모든 회의, 모든 문제에 참여할 필요 없어."

치유사가 미소 지었습니다.

"도발은 선택이야. 필요할 때만 해. 항상 탱커일 필요 없어. 역할을 돌아가며 하는 거야."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세상의 요구와 오해는 감정적인 공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동안 세상에 끼쳐온 영향력들이 빚어낸 시스템의 판단이죠.

당신이 타깃이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이 세계에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어그로는 어떠신가요?

당신은 지금 너무 많은 위협을 홀로 짊어지고 있지는 않나요?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은 정말 방패를 들고 서 있어야만 하는 탱커인지, 아니면 잠시 은신하며 다음 턴을 준비해야 할 때인지 확인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향한 세상의 시선은 ‘무엇’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인지 확인해 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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