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미니맵에 적을 나타내는 빨간 점이 뜨면, 무기를 꺼내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해야 합니다.
"싸워라! 이겨라! 그래야 경험치를 얻고 강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이 거대한 콜로세움 같은 세상에서 전투를 피하는 것은 곧 비겁함이자 패배자의 선택이라고요.
눈앞의 모든 장애물을 부수고 지나가는 것이 승리자의 방식이라고.
그래서 HP(체력)가 바닥을 칠 때까지 쉼 없이 칼을 휘둘려야 한다고요.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근데... 저 레벨 3짜리 슬라임이랑 굳이 싸워야 하나요?"
오늘은 그 의문에 답하고자, 당연하다 생각했던 '전투'에 Skip을 시전 합니다.
게임 속 던전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있습니다.
그중에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다음 맵으로 넘어갈 수 있는 '보스'도 있지만, 쓰러뜨려 봤자 약간의 경험치와 잡동사니만 드롭하는 소위 '잡몹'들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맵에 보이는 모든 적을 섬멸하려 듭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니까요.
사람들은 묻습니다. 가장 강력한 스킬이 무엇이냐고요?
기대 어린 물음에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가장 살아하고 애용하는 궁극기는 바로 [▶▶ SKIP]입니다."
남들이 땀 흘리며 의미 없는 잡몹(Trash Mob)들과 씨름할 때, 저는 조용히 이 버튼을 누르고 옆길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도망이 아니라 '에너지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고도의 전략입니다.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적에게 나의 소중한 체력과 멘탈 그리고 시간을 반복적으로 낭비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죠.
저 슬라임을 잡고 얻는 약간의 경험치보다, 지금 당장의 평온한 나만의 10분이 훨씬 더 값비싼 보상이거든요.
현실이라는 게임에도
수많은 '잡몹'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투를 걸어옵니다.
맥락 없이 화를 내는 무례한 행인
논리 대신 감정만 앞세워 시비를 거는 인터넷 댓글창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을 걸어오는 직장 동료들
우리는 종종 억울함이나 "내가 맞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이 모든 전투에 참전합니다.
하지만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고 사과를 받아낸다고 승리하는 것일까요?
그 치열한 전투의 전리품은 무엇인가요?"
고작해야 알량한 우월감 한 스푼과, 하루 종일 지속되는 불쾌함이라는 디버프뿐이지 않던가요?
진정한 고수는
칼을 뽑아야 할 때와 '무시하기 버튼'을 눌러야 할 때를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시비에 일일이 응해주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한정된 감정 에너지를 바닥에 흘려버리는 낭비죠.
똥을 피하는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이듯, 무의미한 전투 스킵은 '싸울 수 없어서' 피하는 게 아니라, '싸워도 얻을 게 없어서' 건너뛰는 선택인 거죠.
나를 오해하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해명하는 에너지 대신
꽉 막힌 도로 위 끼어드는 차량에 경적을 울리는 화를 내는 대신
'Skip'을 통해 내 내면의 소중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최고의 전투는
'시작하지 않는 전투'라는 것!
그러니 부디 보상도 적은 잡몹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궁극기를 낭비하지 마세요.
그냥 가볍게 Skip을 누르세요!
그 순간, 당신은 이미 이 게임의 진정한 승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