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부터 지인께서 둘째를 맡아주고 계신지도 100일가량 되었다. 아내가 그즈음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어 아이를 기관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우리가 원하는 어린이집에서는 7월부터 공석이 난다고 했다. 그 자리마저 놓칠까 부랴부랴 선수금을 내고 자리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을 방문하는 5월 중순- 6월 말의 시간을 빼고서라도 세 달 반 정도의 공백이 생기게 됐다. 너무나도 다행히 그 기간 동안 지인께서 아이를 돌봐주시기로 한 것이다.
첫째 아이를 오전 8시 25분경 학교에 데려다주고 지인과의 약속장소에 도착하면 8시 40분 정도가 된다. 지인과의 약속 장소는 또 다른 유치원이다. 지인 분은 아이가 둘이고 현재는 전업주부로 계신데 이 유치원은 그분의 첫째 아이가 다니는 곳이다. 8시 40분에 도착하고 나면 지인과의 약속시간은 9시여서 대략 20분 정도의 시간이 남는다. 날씨가 추웠던 지난날들에는 주로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카씻을 답답해하니 차 안에서라도 풀어놓고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함께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날씨가 풀린 뒤로는 차에서 내려 함께 주변을 산책한다. 아이는 마치 태엽을 감은 장난감자동차마냥, 차에서 꺼내 땅에 내려놓는 그 순간 즉시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럴 때 아이는 무척 들뜨고 행복해 보인다. 생명력이 피어오르는 봄 사이사이를 걸어 다닌다는 것이, 풀밭을 발로 밟고 꽃과 나무를 손으로 만지고 느끼는 일이, 이 어린아이에겐 여전히 그토록 새롭고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종횡무진 앞으로 걸음을 내딛다가도 계단이나 도로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마주하면 아이는 발을 멈춘다. 멈춰 선 아이는 잠시 고민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한 번 가늠해 보는 것이다. 어느 때는 혼자 힘으로 도전하고 결국 성공해 낸다. 실은 그래봤자 계단이나 난간에 올라서거나, 금이 가서 벌어져 있는 보도블록을 점프하듯 넘어가는 수준이다. 그래놓고선 어찌나 뿌듯한 표정을 짓는지!
혼자 시도해보긴 하지만 때때로 이내 넘어지고 말 때도 있다. 그때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하고선 나를 바라보며 두 손을 내민다. 안아서 옮겨달라는 뜻, 또는 손을 잡아 일으켜달란 뜻이다. 그제야 난 아이의 손을 잡고 요청받은 도움을 준다. 한 번 더 도전해서 해볼 만하다 싶으면 아이가 다시 혼자 해보도록 독려하기도 한다. 내 도움을 받아 벌떡 일어난 아이는 언제 도움을 받았냐는 듯 내 손 따위는 내팽개치고 다시 전진한다.
머리털 휘날리며 걷고 또 걷기
육아에 정답은 없다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생각해 봄직한 고려사항들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바로 아이에게 양육자가 되어주는 동안 이처럼 딱 한 발짝 뒤에서 걷는 게 아닐까 한다. 이 날의 아침 산책길처럼, 아이는 인생길을 걸어가며 크고 작은 난관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때마다, 귀에 대고 응원해 줄 수 있는 거리, 아이가 손을 내밀면 언제든 잡아줄 수 있는 거리, 때로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보다 아이가 가진 힘과 자원을 발견하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알려줄 수 있는 거리. 그게 바로 딱 한 발짝 뒤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선 이게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닐 테다. 아이의 한 발짝 뒤에서 걷기보다는 아이보다 앞장을 서거나, 아이의 속도보다 더 빨리 손을 잡아끌고 가거나, 때론 붙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있을 테다. 아이가 너무 느려서 답답하게 느껴질 때 우린 앞장을 서거나 아이의 손을 잡아 끈다. 걷는다는 건 어른에겐 너무 익숙하지만 아이에겐 여전히 새롭다는 걸 잊은 채로 말이다.
때로는 아이가 넘어지거나 그래서 다칠까 봐 꽉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싶을 때도 있다. 아이가 다치고 아파하는 걸 흡족하게 바라볼 부모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꽉 잡은 그 손은, 곧 부모의 애정이자 걱정이다. 하지만 그 꽉 잡은 손으로 인해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위험을 감내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자녀를 정말 걱정하고, 위하고, 또 사랑해서라고 하지만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라며 아이를 잡아끌 때 아이는 부모의 드 사랑을 느끼기가 어렵다.
비단 육아뿐 아니라 '양육'이라고 할만한 많은 일들이 그런 것 같다. 꼭 가정 내에서의 양육뿐 아니라 학교 또는 지역사회의 공동체나 다른 기관에서 아이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양육에 무언가를 보탤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의 과정 일부를 양육이라고도 볼 수 있다면 상담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서 걸으며 손을 잡아끄는 게 아닌, 한 발짝 뒤에 서서 함께 걷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이가 선택하며 나아가는 길을 존중하고, 도움을 청할 때 필요한 도움 주기를 주저 않는 것. 아이의 성취뿐 아니라 좌절의 순간까지도 함께하는 것. 아이를 다그치거나 섣부르게 앞장서 아이를 잡아끌지 않고 믿음과 인내로 한 숨 기다려주는 것. 아이의 한 발 뒤에서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