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지수연 Jul 10. 2020

그깟 개와 고양이

세상의 지난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오가 아닙니다. 193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는 앞집 일가가 폭탄에 몰살되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고깃덩어리처럼 죽어나가던 시절, 사람들은 한낱 동물 따위에 관심을 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새끼줄 엮은 신을 신고 서빙고로 얼음을 사러 가던 아침으로부터 채 백 년이 지나지 않았고, 서울에 대포가 출몰하여 아버지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딸들을 찾아 헤매던 시절로부터 채 오십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전쟁을 겪은 이와, 

가난했으나 스스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그들의 자녀와, 

대학을 나와서도 갈 곳을 모르는 그들의 자녀와, 

데스크탑 화면에 손가락을 터치하는 그들의 자녀가 뒤엉켜 현재를 살아갑니다. 

생각의 거리가 동쪽과 서쪽보다 멀고 상식의 기준이 하늘과 땅만큼 먼 이들이 함께 일을 하고 말을 섞고 밥을 먹어요. 


「산다는 게 뭘까.」

지인이 가볍게 던진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산다는 게 뭘까. 거창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올랐지만 가지를 쳐내고 쳐내니 남는 단어는 '과정' 하나뿐이었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이는 과정.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는 과정.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모든 과정을 뒤돌아 봤을 때, '그래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안도할 수 있다면 더없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을 떠올려보면 참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이없는 말실수부터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까지 별별 일들이 있었어요. 초등학생 즈음, 할머니 집에서 혼자 놀다가 책이 빼곡히 담긴 책장을 쓰러트린 적이 있었습니다. 제일 높은 칸의 책을 꺼내려 사다리처럼 책장을 타고 올라가다가 앞으로 쓰러진 책장에 우당탕 깔려버린 거예요. 그때 나는 가족들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혼자 내 키의 두 배 만한 책장을 들어 올려 세우고 책을 쓰러진 모양새 그대로 책장에 끼워두었습니다. 그 사건은 결국 완전 범죄로 무마되었지만 나는 책장에 깔린 타박상에 오랜 시간을 시름시름 앓아야만 했어요. 같은 일이 지금 일어난다 해도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요. 애초에 책장을 타고 올라가지도 않겠지만, 행여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딘가에 먼저 도움을 요청할 거예요. 지난 몇십 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이런 단순한 판단력을 포함한 많은 것들에 성장했으니까요. 그게 바로 어른이 된다는 의미이지요. 


시간과 환경과 경험에 따라 개인이 성장하듯 사회도 그렇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여성의 교육률이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고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지만 그에 따라 환경을 보호하려는 뜻깊은 단체와 개인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성장만 있지 않듯이, 성장을 위해 시련과 우울감과 극복이 반복되어야 하듯이, 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전쟁을 겪었음에도 수입의 일부를 환경에 기부하는 사업가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약자의 희생을 필수 불가결하다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에게 '그깟 개와 고양이'를 말하는 이들은 대개 그런 이들입니다. 



2020년 초여름, 서울의 한 시장에서 상인들이 길고양이를 올가미로 매어 학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 이슈화 되었고 몇몇 동물 단체와 서울시가 연합하여 사건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고양이는 외상이 있었지만 목숨에 지장 없이 무사히 구출되었지요. 하지만 사람으로 혼잡하던 구조 현장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깟 고양이 한 마리 가지고 왜 이 난리들이야!」

바로 그 '그깟 고양이'를 위해 돈과 시간과 마음을 쏟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시킬 수 있는 일일까요. 누군가에게 '그깟 것'으로 치부되는 것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힘겹다는 생각뿐입니다. 


「그깟 개와 고양이」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직후 반려인들이 흔히 듣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깟 동물이 죽었다는 이유로 연차를 쓰고 울고 우울증을 앓습니다. 공허한 마음 위로 아픈 말이 닿으면 쓰리지만 대꾸할 여력은 없습니다. 어차피 무어라 뱉어도 그들은 신에게 사로잡힌 이를 바라보는 무신론자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볼테지요. 그래서 나는 입을 닫고 조금은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합니다. 세계의 혼란함과 전쟁, 개인과 사회의 성장 같은 것이요. 


아직 세상에는 개를 먹을 것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이들이 살아있습니다. 어쩌면 아픈 말의 가해자는 아무런 악의 없이 그런 신념을 물려받은 이들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달라지기를 결심했으나 그러지 않기를 결심한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바뀌었어도 옛 생각을 고수하기로 마음먹은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화가 조금 사그라듭니다. 미움을 넘어서, 그저 받아들여야만 한다 새삼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나 그깟 개와 고양이를 사랑하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깟 것들이 더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이전 02화 텅 빈 집의 오류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펫로스 : 나의 밤은 너로 인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