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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Jul 10. 2020

더 슬픈 사람에게도 봄이,

엄마는 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감수성' 하면 어디에 빠지지 않는 나도 고개를 저을 만큼 감성적이고 여린 성정을 지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어요. 


이지 않는 사회의 룰이라는 게 있지요. 닮은 이들이 모여 있더라도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돕는 것, 덜 슬픈 사람이 더 슬픈 사람을 안아주는 것. 가정 역시 하나의 사회라 그곳에서도 나의 마음은 사회의 흐름대로 움직였습니다. 자연스레 나의 역할은 '먼저 추스르는 사람'이 되었어요. 덕분에 십여 년을 함께한 아이들을 떠나보내고도 넉넉히 슬퍼할 여유는 없었지만 나의 작은 사회는 정상적인 기능을 하며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과정을 일구기 위해 나는 나만의 규칙이 필요했습니다. 

상실감을 추스르는 기간을 넉넉히 갖되 너무 오랜 시간 자책에 빠지지 말 것. 

일정 시간이 지나도 더 슬픈 사람의 우울감이 회복되지 않을 시, 천천히 다음 반려 가족을 알아볼 것.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이 규칙은 우리 가정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더딘 속도로 회복되던 엄마의 펫로스 증후군은 결국 다음 아이를 만나 애정을 쏟는 과정을 통해 마무리되었어요. 그제야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키웠던 아이를 떠나보낸 이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아무 연고도 없이 '열매'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어쩐지 다음 아이의 이름이 될 것만 같았지요. 직전에 떠난 아이의 이름이 '단비'였기 때문일까요. 열매라는 이름을 떠올리니 비 내리는 숲에 맺힌 빨간 열매가 떠올랐습니다. 가문 숲에 내린 달콤한 비. 작고 예쁜 열매를 맺은 나무들. 젖은 눈을 말려주는 산들한 바람. 너무 많이 아파하는 가족들을 보며 단비가 보내준 이름 같았어요. 


저녁 식사를 하며 미리 지어둔 이름을 넌지시 말하던 날, 엄마는 밥을 먹다 말고 엉엉 울었습니다. 이제는 열매가 우리의 가족이 된 지 몇 년이 흘렀습니다만 그때의 우리는 열매가 어떤 아이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은 상태였어요. 형체가 없는 이름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도 엄마는 이유 없이 그렇게 눈물이 났다고 해요. 어쩐지 운명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떠나보내고 맞아들이는 그 모든 과정이요.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을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없듯이, 반려 동물을 맞이하고 보내는 것 또한 사람의 주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려 가족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아이를 맞아들이기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떠나간 아이와 닮은 아이를 다시 가족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애도의 기간을 충분히 갖지 않으면 새로 올 아이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낸 직후, 감정이 격한 상태의 섣부른 행동은 금물입니다만, 사실 나는 새로운 아이에게 애정을 주며 상처의 잔재를 회복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 찬성하는 편입니다. 특히나 '더 슬픈 사람'이 있는 가정이라면요. 


더 슬픈 사람은 기억이 흐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고요, 

자신의 잘못으로 아이가 떠난 것만 같아 오랜 시간 죄책감을 이고 있는 사람이에요. 

어쩌면 그들의 오랜 애도는 덜 슬픈 사람이 잘라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우울한 마음도 습관과 같아서 너무 오랜 시간을 품고 있으면 어느새 스며들어 익숙해져 버리거든요. 


상처 난 피부에 새살이 돋는 것이 자연의 약속인 것처럼, 아픈 마음 역시 언젠가는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혹 곁에 너무 오래 슬퍼하는 이가 있다면 넌지시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것도 좋겠어요. 

「우리 겨울까지만 울자. 

그리고 봄이 오면, 새로운 기회를 주자.

더 지혜롭게 사랑할 기회를 너와 나에게. 

넉넉히 사랑받을 기회를 곧 만날 아이에게.」

세상에는 당신의 애정을 기다리는 작은 생명이 무수히 많고, 

운명의 존재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해 당신과 눈을 맞출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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