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민들레> 155호 기고
* 교육 계간지 <민들레> 2025년 봄호에 실은 글입니다.
몽클레어 패딩은 누가 사는가
지난 해 한 외신은 자녀를 위해 비싼 사치재를 사는 한국 부모에 주목했다. 낮은 출산율 및 소가족화, 과시욕, 소득 증대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며, “한국인은 과시하는 걸 좋아한다”는 한 뷰티 컨설턴트의 발언을 인용했다. 경기도 한 신도시에 사는 김모씨가 “아이들이 결혼식, 생일파티, 음악 콘서트에 갈 때 초라해보이지 않길 바란다”며 두 살, 네 살 딸들을 위해 몽클레어 패딩과 버버리 드레스, 티파티 목걸이를 소비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특정한 재화를 소비한다는 ‘과시적 소비’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공한 사람은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다. 1899년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을 통해 유한계급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소비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인간이 합리적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가정을 비판했다. 유한계급은 ‘재화와 활동의 쓸모없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 지팡이를 사용하거나(손을 써서 노동할 필요가 없는 남자임을 함의) 코르셋을 입고(노동할 필요가 없는 여자임을 함의) 고대어나 수사학 등을 공부하거나 비기능적인 일에 시간을 쓰면서 말이다.
베블런에 따르면 수백만 원대 몽클레어 패딩을 사는 이들은 유한계급임이 틀림없다. 북극 여행에 가는 것도 히말라야 등반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비싼 패딩의 쓸모가 뭐 있겠나. 게다가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데. 내 주위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영유아 자녀를 위해 몽클레어 패딩을 사는 이는 없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몽클레어 패딩을 교복처럼 입는다”는 이 기사가 일부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신도시맘’이 명품을 좋아하고 허영과 사치에 빠진 여성으로 반복 재현되는 것에 대한 피곤함이 들 수밖에.
하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몽클레어 패딩을 사게 되는 심리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아이가 가장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몽클레어 패딩을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아이만 안 입어서 기죽으니까” 산다고 말할 뿐. 명품을 사본 적도, 살 돈도 없지만 나 역시 먼훗날 십대가 된 아이가 “나만 〇〇〇(고가의 무언가)가 없어!” 하며 나를 원망한다면 당근마켓에 검색어를 입력해볼지 모르겠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인은 ‘어쩔 수 없었음’을 호소하며 과시적 소비 경쟁에 뛰어든다. 베블런의 문제의식은 소비의 동기가 자본가의 음모나 광고의 세뇌가 아니라 (방어적 동기라 할지라도) 모든 계급의 경쟁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과시적 소비에서 벗어나려다 빠져버린 함정
베블런의 시대로부터 100년 이상이 훌쩍 지난 지금, 과시적 소비는 모든 계급에 확대되었다. 대량생산, 대중 마케팅, 보급형 브랜드, 모조품이 등장하며 과시적 소비가 민주화되었기에 몽클레어 패딩은 ‘교복’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몽클레어 패딩에 혹하지는 않는다. ‘돈 냄새가 너무 나잖아….’ 대신 나는 다른 종류의 욕망에 더 취약하다고 느낀다.
2018년 『야망계급론』의 저자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은 현대 소비문화를 분석해 유한계급을 잇는 야망계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관찰한다. 커리드핼킷에 따르면 오늘날의 야망계급은 주로 지식경제의 주축을 담당하는 고소득자,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활용해서 사회와 환경을 의식하는 가치관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과거의 유한계급과 달리 더 이상 과시적 소비에 매달리지 않는다. 몽클레어백이나 호캉스 같은 과시적 소비가 모든 계급에 확산되어 더 이상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자신의 지식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비과시적 소비에 몰두하는데, “먹는 것(미식, 유기농, 인간미가 풍기는 집밥), 식료품을 사는 곳(농민 직거래 시장과 홀푸드), 입는 옷(유기농 면과 라벨 없는 미국산 제품), 이야기하는 주제(월스트리트저널 기사나 시리얼 같이 화제가 되는 팟캐스트) 등 모든 것”에서 은밀하게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분 짓는다.
커리드핼킷은 특히 야망계급의 모성과 육아 문화에 집중하면서, 자연주의 출산‧모유수유‧애착육아 등의 기표가 이들의 계급을 과시하는 새로운 사례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돈이 많이 들지 않고 도덕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대다수 가정의 평범한 관계와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자본과 상징자본,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자유시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안다. 내가 코로나로 어영부영 아이를 보육기관에 보내지 않고 3년 가까이 데리고 있었던 것, 유기농 매장을 들락거리며 이유식을 해먹인 것, 발도르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것 모두 시간과 돈,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특권적 실천이라는 걸. 차라리 몽클레어 패딩을 사는 게 더 쉽지. 게다가 이러한 실천은 더 ‘진정성’ 있게 살고 있다는 알량한 우월감마저 준다. 야망계급의 소비 실천은 가치있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지식과 가치관을 이용해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별 짓기 위한 것이 될 때, 자신과 같지 않는 이들을 열등하게 보기 위한 것이 될 때 위험하다.
이쯤 되니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다. 과시적 소비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과시적 소비에서 자유롭다고 느낄 때조차 야망계급적 소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이런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나요?
소비를 통해서만 나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
몽클레어 패딩은 아니지만 내가 찾는 무언갈 사면 ‘내가 원하는 나’가 될 거라는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보온 효과가 좋으면서 세척이 간편하고 가방에 쏙 들어가는 궁극의 텀블러를 찾아 헤맬 때가 그랬고,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고 거기다 가격까지 저렴한 코트를 찾아 헤맬 때도 그랬다. 지난 여름엔 백팩이었다. 찌는 듯 더운 날 업무차 지하철을 탈 때, 아이 등하원을 시킬 때, 백팩을 메면 양손이 편하겠지? 한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원한 음료를 담은 텀블러를 들어도 괜찮겠지? 그런 상상을 할 때 나는 몽클레어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은근히 힙한 40대, 백팩을 메고 반듯한 자세로 지하철을 누비는 프리랜서, 경쾌하고도 여유로운 양육자였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1만원 후반대에 판매하는 백팩을 구매하려다 멈칫했다. ‘이건… 설레지 않아. 이 가방을 멘 사람은 너무 많을 거야.’ 결국 오랜 검색 끝에 최근 MZ세대에게 인기 있다는 한 브랜드의 백팩을 발견했다. 원래 구매하려던 가방의 3배가 넘는 가격이었지만 톤다운된 다양한 컬러가 매력적이었다. 인기있는 컬러는 나오는 즉시 품절이라 몇 번을 쇼핑몰 사이트를 들락날락한 끝에 간신히 구매한 이 백팩의 결말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다.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가방만 있으면 명품에 관심 없으면서도 은근히 힙하고 실용적인 이미지를 챙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흐릿해졌다. 나는 가방 하나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일찍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심미적 판단은 언제나 구별의 문제라고 말했다. 취향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탄이면서 동시에 ‘구린 것’에 대한 경시, 더 나아가서 ‘구린 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경시다. 훌륭한 취향은 모두가 가질 수 없기에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지며, 자신의 미적 감각이나 취향의 표현으로서 물건을 살 때 우리는 제로섬 게임에 참여하는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업들은 물건이 아니라 훌륭한 취향과 스타일, 더 나아가 자아감을 판다고 속삭이고, 나는 자꾸만 실체 없는 자아감을 좇아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보여줄 물건을 찾아 헤맨다.
오늘날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서 사회에 참여한다. 아이돌 팬은 몇백 장의 앨범을 구매하고 유료 소통 어플을 깔고 기획사가 만든 굿즈를 사는 것으로 ‘내 새끼(스타)’의 성공을 응원한다. 결식아동이나 이재민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에 유익한 일을 한 자영업자에게 ‘돈쭐’(‘돈’과 ‘혼쭐내다’의 합성어)을 내는 것으로 그의 선행을 응원한다.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드러내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거나 비영리단체의 굿즈를 사고, 페미니즘 문구를 담은 티셔츠, 에코백, 스마트폰 케이스를 산다. 우리는 애정이나 신념을 표현하는 일조차 소비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 신자유주의 논리는 비즈니스와 사회 변화 사이의 구분을 흐리면서 소비를 통한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정치 사회적 신념조차 개인적 소비의 문제, 미학적 감성과 취향의 문제로 축소되기 쉽다.
몽클레어 패딩으로 대표되는 과시적 소비는 ‘남보다 돋보여야 하는 나’, ‘남에게 지지 않아야 하는 나’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소비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외치면서 ‘남들과 다른 소비와 선택을 하는 나’, ‘진짜 나의 욕망’, ‘진정한 나’라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환상이 또다른 소비 경쟁에 참여하게 만드는 핵심 유인책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표현하는 일 역시 개인적 소비의 문제로 미끄러지기 쉬운 시대, 내가 소비의 자장에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괴롭다. 이런 나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무언가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저들과 다르다며 안도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지도 않고, 이 세계와 이 세계에 연루된 나 자신을 직시하는 것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