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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Sep 04. 2024

"남편 이야기는 왜 안나오죠?"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출판 뒷얘기


원고를 투고하는 과정에서 한 출판사와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파토난 적이 있다. 원고를 호의적으로 봐준 편집자님과 달리 대표님은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원고에 남편 이야기는 왜 안나오죠?” 


조금 추가되기는 했어도 내 책에는 남편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엄마’라는 조건을 맞닥뜨린 여성으로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나의 이야기에 애써 그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주인공이야, 저리 비켜’의 심정. 사실 그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문단에 다 담겨있었다. 


" 내가 과학적 지식으로 아이를 만들어가는 엄마, 공감하는 엄마라는 모순적 이상 속에서 홀로 뒹구는 동안 남편은 뭘 하고 있었을까? 그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에 대해 걱정할 여력이 없었고, 걱정하지 않으리라 작정한 것 같았다. 내가 알던 그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먼저 걱정하고 촘촘히 대비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긍정의 화신’이 되어 외쳤다. “우리 기특이는 잘 클 거야! 지금도 잘 크고 있잖아.”


그가 낙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만큼 걱정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 총량의 법칙’을 아는가? 어떤 사안에 대한 걱정거리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걱정을 떠맡으면 다른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내가 만든 말이다.) 그는 대학병원 진료 때마다 교수들이 언급하는 많은 가능성에 대해 직접 들어본 적이 없다. 재활치료를 직접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아이와 24시간 함께하며 ‘버럭’과 ‘현타’ 사이를 깊이 오갔던 적이 없다. 내가 걱정을 짊어지고 교육노동에 매진했기에, 그는 초연한 입장에서 걱정으로 가득 찬 아내를 위로하는 남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위로에 기대기도 했으나, 그의 낙관은 당사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표지처럼 느껴졌다.이설기,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101-102 



일어나지 않을 일을 먼저 걱정하고 대비하던 사람이 별안간 ‘긍정의 화신’이 되어 “우리 가특이는 잘 클 거야! 지금도 잘 크고 있잖아.”를 외치는 기적.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불확실성과 널뛰는 감정들을 견디지 못하고 회피하는 무능력. 온 세상이 육아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와중에 한발 비켜서 있을 수 있는 자의 여유와 초연함. 그런 장면이 은은한 배경화면처럼 책 전반을 감싸기를 바랐다. 한 블로거는 내 책을 이렇게 핵심적으로 요약(?)해주었다. 


"오은영이라는 절대신의 지령, 각종 병원과 재활의학 전문가의 회초리, 맘들 커뮤니티에서도 매일 작동하는 평가와 평가, 발달자극과 공감육아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불가능한 과업, 모든 문제의 원인은 엄마가 지닌 과거의 상처, 여기에 장애라는 요소가 붙으면 더욱 빠져나올 수 없는 죄책의 세계, 결정적으로 무책임한 낙관주의자의 위치에서 구경하는 남편의 존재.."


‘결정적으로 무책임한 낙관주의자의 위치에서 구경하는 남편의 존재’ 여기서 나는 혼자 끅끅거리며 웃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라고요! 눈 밝은 독자들이 알아채주길 바랐을 뿐, 내가 더 밀어붙여서 쓰지 못했다. 그는 말과 글에 호락호락하지 않다. 출판을 위한 글인 이상 그의 허락을 구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과정은 지난할 것이다... 그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나의 글쓰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는 내가 쓴 글에도 예상외로 아무런 생각이 없다.)


글을 쓰면서 참고한 “Doing their jobs: mothering with Ritalin in a culture of mother-blame”라는 논문에는 ADHD 진단을 받은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를 비난하는 당사자로 남편이 등장한다. 자녀의 ADHD 진단에 대해 남편들의 대응에는 비슷한 패턴이 있다. 일단 "우리 애는 멀쩡한데 네가 예민한 거다"라며 자녀의 진단명을 부정하고 배우자의 판단을 깎아내린다. 한편으로는 "네가 애한테 좀 엄하게 하면 더 나아질 거다"라며 배우자의 양육 태도가 문제라고 암시하기도 하고, "(아이의 문제를) 이제 어떻게 할거야?"라고 물으며 자신은 쏙 빠져나가기도 한다. 


‘당신 애를 도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라고 대놓고 비난하는 남성은 요즘 시대에 많지 않다. 하지만 자녀에게 질병이나 장애가 있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사건이나 사고가 닥친다면, 많은 남성은 문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네 탓이라는 뉘앙스를 흘리는 방식으로 모성 비난에 동참한다. 모성 비난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의 자아분열을 견디지 못하고 가장 손쉬운 상대에게 문제와 책임을 전가하는 거다. 그게 무능력이지 다른 게 무능력이 아니다. 무능력한 와중에 초연한 입장에서 위로하는 역할까지 하려고 하면 아래와 같은 사태 발생. 



https://youtu.be/1L7pfbsbSg4?si=QwkoHzCPhEUgG7rf


강주은 왈 : "굉장히 여유 많아서 축하하고." 


고난과 시련 앞에서 하나가 되는 부부는 많은 경우 환상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돌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다하고 예측불가한 위기들 앞에서 많은 여성들은 남성의 무능력을 실감하고 진저리친다.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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