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21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스물한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직업이 관장이라는 이정모의 <달력과 권력>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환갑을 넘었지만 놀랍게도 40도 되기 전에 이 책을 썼습니다. 30대에 책을 쓰는 게 드문 일이 아니기는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언뜻언뜻 어떻게 이런 걸 깨달았을까 싶은 곳이 많습니다. 특히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나이에 대한 그의 해석이 그렇습니다. 그의 해석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개연성이 아주 높아보이는 논리여서 저는 당분간 그 관점에서 성경을 읽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달력과 권력>이라는 제목이 좀 도발적이지 않나요? 읽어가다 보면 아마 머리가 끄덕여지실 겁니다. 링크는 아래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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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과 권력
이정모
부키
2001년 1월 10일
이제는 모두 그레고리안 달력으로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우디 모든 공식 문서의 날짜는 헤지라 달력으로 표시했다. 이슬람 최대 명절이자 사업 추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라마단과 핫지 역시 헤지라 달력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헤지라 달력에 익숙해야 했다. 사우디에서는 회사 운영과 관련된 인허가가 많고 갱신기간을 넘으면 즉시 효력이 정지되기 때문에 인허가 기준일인 헤지라 달력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을 사용하는 게 헤지라 달력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윤년을 둔 태음태양력이어서 그레고리안 달력과 함께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이 없고 계절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이에 비해 순수한 태음력인 헤지라 달력은 윤년이 없어 한 해가 354일에 불과하고, 매년 11일씩 당겨지다 보니 사우디 부임했을 때 늦여름이었던 라마단이 떠나올 때는 이른 봄까지 당겨졌다. 계절과 무관한 달력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 삶과 직결된 달력을 권력으로 해석한 독특한 책을 읽었다. 달력이 권력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권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0-11-12월을 뜻하는 October-November-December는 각각 8-9-10을 뜻하는 라틴어 octa-nona-deca에서 비롯되었지만 원래 차례와는 다르게 두 달씩 밀린 것인데, 이는 로마의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두 달 앞당겨 취임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일어났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권력자들이 달력을 바꾸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1793년 프랑스 국민의회가 혁명 달력을 제정했다. 한 달을 30일로 하고 그렇게 열두 달을 한 해로 하되 남는 5일은 휴일로 삼았다. 문제는 한 주일을 10일로 만든 것이다. 게다가 하루를 20시간으로, 한 시간을 100분으로 정했다. 이는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속셈 때문이었는데, 정작 반발은 일주일을 7일에서 10일로 늘인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시민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이는 다른 나라와 거래하는데도 큰 장벽이 되었다. 이 달력은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1929년 시행된 소비에트 달력은 ‘생산이 중단되지 않도록’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주일을 5일로 정하고 한 달은 6주, 1년은 72주가 되도록 만들었다. 나머지 5일은 국경일로 삼았다. 그리고 모든 국민을 5개 그룹으로 나누어 자기 그룹에 해당하는 요일에 쉬도록 만들었다. 5부제 근무였던 셈이다. 그 결과 언제나 각 직장의 노동자 중 20퍼센트는 쉬었지만 나머지 80퍼센트는 멈추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이에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 이 방식에 반발하고 나섰다. 노동자들의 일가족은 서로 다른 요일에 지정되어 일가족이 함께 모일 수 없게 되었고, 경영자들은 어느 요일에 회의를 열어도 언제나 20퍼센트는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과학 저술가이자 강연자로 유명한 저자가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1999년 어느 날 “지난 천 년에 모두 며칠이 있었는가”라는 ‘새천년 맞이 퀴즈’에 자신 있게 응모했다. 율리우스 달력과 그레고리우스 달력의 윤년 규칙을 알고 있어 자신만만했던 필자는 자신의 답이 정답과 열흘이나 틀렸다는 것을 알고 달력 연구에 매달려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지구의 공전과 달력의 미세한 차이가 누적되어 달력이 계절과 맞지 않게 되자 1582년 10월 5일에서 14일까지 열흘을 달력에서 없애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하루로 삼았을 때 한 달은 29.530589일이고 한 해는 365.24219879일인데, 그러다 보니 소수점 이하의 차이가 모여 달력과 자연 현상이 열흘이나 벌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 모두 10월 4일 밤에 잠자리에 들어 10월 15일에 일어난 셈이다.
저자는 하루와 한 해 사이에 한 달이 생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하루(일)는 세월을 헤아리기에 너무 짧고 계절이 다시 돌아오는 한 해(년)는 정확히 헤아리기엔 너무 길어 그 중간 어디쯤 되는, 달의 변화를 기준으로 삼은 한 달(월)을 선택했다. 달은 해와 달리 눈에 잘 보이고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을 쉽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는 문명시대에 이르기 훨씬 이전부터 태음력을 만들어 사용했다.”
저자는 이런 이해에서 출발해 고대에는 ‘년’과 ‘월’을 혼동했을 수 있다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재해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 있는 대목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수백 년을 살았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산 것을 두고 워낙 인간의 수명이 수백 년인데 인간이 타락해서 수명이 짧아졌다는 사람도 있고, 노아의 홍수 때 비가 쏟아지면서 오존층이 뚫려서 그렇게 됐다고 나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나는 그것을 그저 ‘오래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수사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것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저자는 시편 90편에 기록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당시 사람들의 나이가 75세 정도였을 것으로 가정하고 성경의 나이를 풀어나간다.
저자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서 시작해 노아까지는 (년과 월을 혼동해) 1개월을 1년으로 쳤을 것이고, 노아의 후손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다섯이라는 숫자가 인간에게는 매우 익숙한 셈법이었을 것이므로) 5개월을 1년으로 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12달이 1년인 것을 알고 사용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1년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1년이라는 기간을 판단할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달의 모양이 바뀌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매듭으로 보았고, 그 매듭을 1년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성경을 해석할 때 입버릇처럼 당시 사람들의 ‘한정된 지식’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돌이켜보니 정작 이 사안에 대해서는 ‘한정된 지식’은 생각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그렇게 셈하면 969세까지 살았던 므두셀라는 80세, 175세까지 살았던 아브라함은 73세까지 산 것이니 저자가 기준으로 삼은 75세와도 어울리고 지금 우리 상식에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저자의 이런 생각을 판단할 만큼 아는 게 없고 본문을 살펴봐도 그렇게 해석할 만한 근거도 보이지 않는다. 찾다 보니 각주에 작은 글씨로 ‘자신의 사고유희(思考遊戲)’라고 적어놓았다. 소위 말하는 ‘뇌피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길게 인용하는 것은 그 추론에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지식과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과 거리가 멀고 그 사실이라는 것도 시대가 다르면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언젠가 저자가 방송에 나와 “과학이란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답변”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크게 공감했던 일이 있다. 정말 그렇다.
성경을 신앙고백서로 이해하는 내게 성경의 인물이 나이가 몇인지 그것이 사실인지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저자의 추론을 통해서 성경이 기록된 수천 년 전의 1년이 지금의 1년과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지침이 될 만하다. 그것이 어디 성경뿐이겠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깨닫는 일, 그 일이야말로 모든 분야에서 한계를 뛰어넘는 출발점이자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현대 달력에 문제가 많아 하루빨리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달력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1월 1일이 매년 달라 매년 달력을 새로 만들어야 하며, 한 주일이 두 달에 걸쳐 있고, 한 달과 한 분기와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부활절과 같은 교회 축일이 오락가락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새로운 달력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태 그렇게 생각해 본 일이 없기는 하지만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것일까? 유머가 넘치는 저자의 화법을 생각하면 웃자고 한 말 같기도 하고, 그렇기에는 문장이 너무 진지하고.
아무튼 이 책을 소개한 방송을 듣고 흥미가 생겨 읽기는 했는데, 얄팍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재미로 읽기에는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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