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에 대한 바른 이해
권보드래
돌베게
2019년 3월 1일 초판
“삼일운동은 고종 인산일에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시작된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이었으며, 이 일로 인해 수많은 동포들이 고초를 당하였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의 기틀을 이루었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서 이 정신을 이어받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알고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일찍부터 배워온 삼일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것뿐인데도 삼일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삼일운동은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버팀목이라고 생각한다.
삼일운동 백 년째 되는 날 고려대 권보드래 교수가 펴낸 ‘3월 1일의 밤’을 읽고서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의 근현대문화를 연구하는 권보드래 교수는 1900년대 초 문학 형성과정에 대한 박사 논문을 마친 후 이후의 사회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삼일운동에 대한 자료를 읽기 시작한 이래 이십 여 년 가까운 세월을 삼일운동 연구에 쏟아 부었고, 마침내 삼일운동이 시작된 지 백 년째 되는 날 ‘3월 1일의 밤’이라는 육백오십 여 쪽에 이르는 저서를 열매로 내놓았다.
저자는 삼일운동이 많이 이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라고 했다.
“삼일운동은 낮, 장터, 태극기로 표상되지만, 다른 한편 밤의 사건이요 산 위에서 만세 부른 사건이며 독립만세기를 휘날린 사건이다. 어디서는 3월 초로 끝났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12월에야 시작된 사건이자, 누구에게는 성대한 평화시위로, 다른 이에게는 면사무소를 습격한 경험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식민권력의 통계로도 약 60만에서 100만이 참여했다고 할 정도다. 인구 1,600만의 3.7~6.2%에 이른다. 교통 통신이 미비했고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체도 없었는데 말이다.”
“봄철 내내, 낮에 장터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3월 1일 밤 서울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만세를 불렀고, 평양에서는 수천 명이 낮보다 성대하게 악대를 앞세우고 등불 손에 든 채 시내를 행진했다. 그들은 어스름녘 시내에서 전차에 투석하고, 어둠이 짙어질 때 뒷산에서 봉화 올리고, 밤 깊어갈 무렵 모여서 산 너머 주재소를 향하곤 했다.”
그래서 저자는 삼일운동 한복판에 서있던 축보다는 ‘3월 1일의 밤’에 가까운 덜 알려진 사람, 즉, 만세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 시위행렬을 따라다닌 게 고작인, 돌 한 번 던지곤 다시는 역사에 떠오르지 않은 수많은 무명씨들을 우선 다루었다.
삼일운동은 조직화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본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이 독립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고, 그래서 3월 1일 오후에 평양집회는 ‘독립축하회’로 열렸다. 독립은 이미 현실이 되어 경찰과 헌병이 이를 방관하는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붙고 태극기가 휘날렸다. 이런 ‘예언적 소문(prophetic rumor)’으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해방구가 조성돼 ‘대한독립운동 준비사무소’가 생기고, 자치적으로 행정을 집행하기도 했고, 면사무소의 비품과 자금을 압수하기도 했다. 가히 독립되었다고 믿기에 부족함이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오보인 것이 밝혀지면서 군중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끈질기게 퍼져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조선이 독립되었으나 일본이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젊은 유생이 일본 국왕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경고하기도 했다. 좀 더 사정을 자세히 짐작하는 사람들은 한창 진행 중인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 독립이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므로 곧 나라를 되찾으리라 기대했다.
삼일운동은 근 십여 년간 일체의 정치 사회적 조직이 금지된 상황을 뚫고 나온 봉기였으나, 대부분은 외부와 어떤 조직적 네트워크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났다. 인산에 참여했다가 얻은 독립선언서나 각처에서 일어난 만세 소문 외에는 어떤 배후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촌락 단위 동원을 한 경우가 많기는 했어도 지위가 특별할 것 없는 소수가 문서와 깃발을 준비해 시위를 일으킨 경우 또한 많았다. 결국 일본정부에서 우려한 ‘조선으로 하여금 신독립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각 지방 봉기를 조직 지휘한 중심체’는 삼일운동을 통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독립을 꿈꾼 이들이 생각한 독립은 놀랍게도 무너진 왕정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정, 공화정이었다. 손병희는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냐는 검찰의 신문에 “민주정을 할 생각이며,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유럽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라는 것이 없어지게 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4월 23일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는 ‘공화 만세’라는 깃발이 등장했다. 3대 만세 지역으로 꼽히는 황해도 수안에서는 3월 3일에 이미 “공화정치는 세계의 대세이니 속히 분대를 명도하고”고 외쳤고, 평북 선천에서는 “우리 조선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신국가를 건설하려고 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보다 신중한 측은 왕정과 공화정 양쪽 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독립이란 황제 또는 대통령이 나와 조선을 통치한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부 유생은 “이조의 부활을 희망하지는 않으나 결국은 왕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조는 유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삼강의 가르침에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는 법인데 공화제가 되면 유생의 입장이 없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의병장 한 사람은 “선거제는 자칫 외세에 의존하기 십상인 반면 왕정은 국민 통합과 정치 안정에 보다 유리하다”는 실리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주장하였다.
어찌 되었든 대다수가 삼일운동을 통해 독립하고자 했던 나라는 공화정, 민주정이었으며, 왕정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움직이면 돈인데, 그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곳에서 움직이려면 상당한 자금이 드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삼일운동의 자금에 대해 들어본 일도, 생각해본 일도 없다. 독립선언서나 휘두를 태극기를 만드는 데도 돈이 들었을 것이고, 밤에 시위 벌일 때 횃불 봉홧불은 그냥 피울 수 있는 것인가. 당시 격문도 적지 않았고 지하신문도 다수 발간되고 배포되었다. 독립선언서나 격문을 지방으로 배포하는데 여비로 지불된 돈도 그렇고, 제등행렬도 적지 않았고,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물마시게 하고 요기하게 하는 것도 거저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사무원 월급이 25원 남짓이었는데 독립선언서 한 장 붙이는데 1원을 지불했다는 기록도 있다.
천도교에서는 거금 5천 원을 부담했고, 이밖에도 교섭과 회의에 필요한 자금과 인쇄 배포에 소용되는 자금 대부분을 책임졌다. 해외로 대표를 파견하고 관련자들 옥살이를 돌보는 자금도 댔으며, 교인들이 밥 지을 때 성미를 한 숟가락씩 덜어 모았으며, 천도교회당 신축기금을 걷었다 반납을 지시받은 것을 허위 영수증에 날인만 받은 후 다시 거둬들여 쓰기도 했다. 도쿄 2.8 독립선언 때 정노식이 2천 원을 지원했는데, 2.8 독립선언서를 번역해 파리 평화회의에 타전하는 데만 거금 720원이 들기도 했다. 평남 용강에서는 격문 만들 종이를 사기 위해 참여자들이 2전씩 갹출했다. 경기 가평에서는 깃발 제작비용을 동리에서 공동 지출했다. 경남 합천에서는 만석꾼 김홍석이 거금을 희사해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서울 경성고보에서는 학생이 집에서 붙여온 학비 10원을 털어 격문을 제작했다.
저자는 “구차할 수밖에 없는 세목들 - 천과 물감과 종이와 잉크와 등사기, 게다가 담뱃값과 식사대와 교통비 등의 항목은 삼일운동 관련 자료를 통해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누구든 싫도록 목격해왔듯 돈이 많은 것을 의미하고 여러 가지 일을 가능케 한다. ‘2.8 독립선언서’와 ‘기미 독립선언서’의 언어적 수행성도 돈 없이는 무용지물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삼일운동은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그런데 그 비폭력 저항운동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비폭력은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인지 힘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은 건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평남 강서군에서는 시위대에 발포한 일본 경찰의 총을 빼앗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려쳐 일본 경찰 이 몇 명 사망했다.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할만한 기구를 갖고 간 것도 아니었고, 돌맹이조차 들지 않고 주재소로 향했으나 일본 경찰은 이를 관청기물을 파괴하려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응대해 시위대의 저항을 촉발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출동해 남성 4백 여명을 무차별 연행, 혹독하게 고문했다. 그러나 이런 저항조차 극히 일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일운동을 통해 목적의식적 무기 확보가 시도된 일이 없었다. 우발적 탈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집단적 목적의식적 탈취가 없었다는 것이다. 광산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에도 화약 탈취는 일어나지 않았다. 삼일운동 당시 총기 입수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남, 평북, 경북 등지에서 총기를 탈취한 경우가 있었지만 다음날 순순히 총기를 반납했다.
저자는 “삼일운동의 결정적 특징 중 하나가 공포와 희망 사이를 분노가 매개하는 가운데 대중은 ‘폭력이 된 권력’을 휘두르는 식민권력에 맞서 줄기차게 ‘폭력 너머의 힘’을 추구하고 실천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이 비폭력을 고수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3월 5일 아침 남대문역 시위 후 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는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학생들 상당수가 등교를 거부하고 귀향을 택했거나 주도 세력 대부분이 검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시위를 이어간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3월 8일 용산 인쇄국 노동자 200명, 9일 동아연초 노동자 500명, 같은 날 철도국과 경성전기회사 직공과 차장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파업하거나 영업을 거부하였다. 3월 22일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도시노동자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며, 이후 노동자는 시위를 계획할 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삼일운동은 노동자라는 존재를 사회화시켰고 노동문제를 전 사회적 문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인들의 삶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조선에서 공장 노동자의 비중이 전체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막 제기되기 시작했던 노동문제는 아직 ‘독립 만세’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삼일운동은 한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는데도 우리는 3월 1일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어떻게 언제까지 진행되었고, 그 운동을 통해서 회복하고자 했던 나라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그 정체는 어떤 과정 어떤 배경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삼일운동은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지 못한다. 막상 알고 있는 것은 독립선언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유관순 열사와 같은 특정한 이미지 몇 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3월 1일의 밤’은 삼일운동이 그저 역사책에 실려 있는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치르고 이루어낸 아주 구체적인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었기에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었고, 그 자금은 재산가의 거액의 후원금으로부터 시위 참여자들이 격문을 제작하기 위해 갹출한 2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다만, 삼일운동으로 대중들이 복구하고 싶었던 국가는 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이었으며, 이러한 목표는 소수의 지도자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시위 참여자들의 광범위한 공감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결정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무기를 갖출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굳이 비폭력운동을 고수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것 또한 아쉽다.